개념 놀이
급하게 피난을 떠나는 상황에서 당신은 무엇을 챙기고 떠나겠는가? 무인도에 불시착하기 전 자신의 물건 중에 하나를 챙겨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챙기겠는가?
현금 다발을 가방에 넣고 피난을 떠난 어느 양반은, 굶주리는 배를 참다못해 쌀 포대를 짊어진 어느 농부에게 흥정을 하기 시작한다. 내가 100냥을 줄 터이니 쌀 한 포대를 파시오. 농부가 별 미친놈을 다 보겠다며 비웃고 자리를 뜨려 하자, 그럼 반포대, 아니 한 그릇만 파시오라고 애원하지만 농부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굶어 죽을지도 모르는 혹한의 피난길에서 돈은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인도에 불시착하는 와중에 돈다발을 먼저 챙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것들의 실질적 가치는 그저 사회적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회적 약속에 너무 길들여진 탓에 피난을 떠나는 부자 양반은 그만 돈을 들고 떠나버렸다. 돈에 대한 개념이 매우 실체적인 탓에 그것이 정말 가치 있는 것이라 착각한 것이다.
개념이 없이는 소꿉놀이를 할 수 없다. 돌멩이를 갖다 놓고 '우리 집'이라고 여겨야 하며 땅에 선을 긋고 우리 땅이라고 해야 하며 작은 나뭇가지를 아들이나 딸이라고 해야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애들아 저녁 먹어라' 엄마의 한 마디에 소꿉놀이에 사용된 모든 개념은 바람처럼 사라진다. 돌(집)은 다시 길가의 돌로 돌아가고 나뭇가지는(자식) 다시 길가의 나뭇가지로 돌아간다. 그러나 태어나 평생 소꿉놀이를 해온 아이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다시 돌을 돌로 보고 나뭇가지를 나뭇가지로 보는 일이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 개념의 놀이를 구분하지 못하면 급할 때 쌀 대신 돈을 들고나가고 이불 대신 통장을 들고나가는 일이 벌어진다.
'나'라는 것이 개념이라고 말하면 대부분은 매우 큰 거부감을 갖는다. '나'라는 개념을 갖고 너무 오랜 시간 소꿉장난을 해 온 탓에 정말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나'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대부분은 '몸'을 말한다. 몸과 동일시한다. 그러니 '나'가 없다는 말을 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로 오해를 하기도 한다. 그래서 멀쩡히 몸이 인식되고 있는데 '나'를 개념이라고 하니 혼란스럽다고 한다. 이건 절대 어려운 말이 아니다. 그동안 살펴보지 않았던 오래된 책을 슬쩍 한 번 열어보는 것만큼의 정성이 필요할 뿐이다. 숨겨진 의미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바꾸거나 얻을 필요도 없다. 있는 그대로 한 번 보면 된다. 당장 급한 일이 벌어지면 있지도 않은 '나'를 챙겨 달아나려고 삶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머리로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몸과 마음이 '나'라는 느낌이 계속 듭니다. 내가 보는 것만 같고 내가 느끼는 것만 같고 내가 듣는 것 같아요. 어떻게 '나'가 없다고 그러시는지 잘 이해가 안 갑니다.
그 '나'라는 느낌은 사실 '나'라는 느낌이 아니다. 그냥 느낌일 뿐이다. 봄, 들음, 느낌이 있을 뿐이지만 그것을 내가 느낀다고 자꾸 이름표를 붙이며 착각하게 된다. 가만히 살펴보라. '나'라는 느낌이란 없다. 그저 느낌만 있을 뿐이다. 그 느낌에 '나'를 갖다 붙이는 게 생각이다. 몸과 마음도 역시 당신 것이 아니다. 무엇이 무엇을 소유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글:무소유 참고) 당신이 당신의 몸을 소유한다는 것도 애초에 불가능하다. 일어나는 경험 역시 당신의 소유가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은 강 건너에서 자라는 이름 모를 나무와 같다. 당신이 가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것을 가질 '나'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고 내가 흔들었다고 착각만 할 뿐이다.
이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냥 딱 한 번 보면 끝나는 일이다. 추측하지 말고, 짐작하지 말고, 직접 보라. 누구의 말도 믿지 말고 정말 그런지 한 번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