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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말록 Dec 27. 2020

경험을 누가 하는가?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이것들을 누가 보고 있나요?

누가 감각을 느끼고 있나요?

누가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있나요?

이 모든 직접적 경험을 누가 하고 있나요?

나?

이런 질문을 하면 언제나 한결 같이 '나'가 한다고 대답합니다. 당연히 내가 말하고 행동하고 보고 듣고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이 주체로서의 '나'라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이 몸이 세상에 태어나서 삶을 살고 있으며 그것이 '나'라고 생각합니다. 즉, 이 몸-마음의 유기체를 '나'와 동일시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나’라는 느낌과 믿음은 너무나 강력해서 쉽게 다른 생각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가정이 사실인지 의심해 봐야 합니다. 생각과 믿음을 제쳐두고 지금 일어나는 직접적인 경험을 봐야 합니다. 몸의 자극과 움직임을 가만히 살펴보세요.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보세요. 그 모든 일어남을 컨트롤하는 ‘나’라는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세요. 심오하고 복잡한 얘기 아닙니다. 그대로 드러나 있어요. 눈을 가리는 건 스스로의 생각과 믿음들 뿐입니다.


만일 정말 이 모든 행위와 경험의 주체가 '나'라면, 이 경험을 할지 혹은 하지 않을지 선택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즉, 경험하지 않음이 가능해야 합니다. 그것이 경험하는 자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경험하는 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험은 그냥 일어납니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경험에 있어서 '나'는 뭔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어요. 생각 속의 유니콘이 아무 능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생각의 내용 속에만 존재합니다. ‘나’를 육체라고 가정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육체는 모든 행위와 경험의 주체가 아닙니다.


나무가 스스로 '열심히 자라야지'하면서 자라는 게 아닙니다. 나무는 그냥 자라납니다. 나무가 열심히 '가지를 흔들어야지'하면서 흔드는 게 아닙니다. 가지는 바람에 의해 그냥 흔들립니다. 사람이 '내가 열심히 자라야지' 하면서 자라고 '늙어야지' 하면서 늙는 게 아닙니다. 나무가 광합성을 하는 게 아니라, 광합성이 나무라는 영역 안에서 일어납니다. 마찬가지로 심장이 '열심히 뛰어야지'하면서 뛰는 게 아니고 피가 '열심히 돌아야지'하면서 도는 게 아닙니다. 삶과 죽음을 통틀어 일어나는 모든 것이 이렇습니다. 나무와 육체는 스스로 어떻게 하고자 해서 움직임이 일어나는 게 아니고 저절로 그렇게 일어나는 겁니다. 여기에 '나무'라는 주체성이 없고 '육체'라는 주체성이 없어요. 이런 주체성이 없는 육체가 경험의 주체라는 말은 매우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육체(나)는 경험을 하지 않음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보지 않음을 선택할 수 없고 듣지 않음을 선택할 수 없고 경험하지 않음을 선택할 수 없어요. 경험은 그냥 일어납니다. 눈을 감으면 된다고요? 귀를 막으면 된다고요? 잠을 자면 된다고요? 그래도 눈을 감는 경험, 귀를 막는 경험, 잠을 자는 경험은 여전히 일어납니다. 경험을 하지 않을 방법이 육체(나)에게는 없습니다.  누가 눈을 감고 누가 귀를 막고 누가 잠을 자는지 생각해보세요. 행위의 주체가 무엇인지 살펴보세요.


행위는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행위를 '나'가 했다는 생각이 이어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나'가 했다는 생각이 없이도 행위는 그냥 연기적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나'가 행위의 주체라는 뿌리 깊은 생각은 말 그대로 생각일 뿐입니다. 그 생각과 상관없이 행위는 일어납니다. 내가 무언가 의도를 가지고 그런 행위를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의도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따라가 보세요. 그 의도는 '나'가 일으키는 게 아닙니다. 지금 당신의 식성, 취향, 버릇, 육체적 모양, 생각 패턴 모두 당신이 선택했나요? 당신이 스스로 선택한 게 단 하나라도 존재하나요? 선택할 당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의 선택이 존재하지 않아요.


이러한 이해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생각은 매우 강렬하게 버릇처럼 따라다닐 겁니다. 그것 역시 당신이 선택한 게 아닙니다. '나'라는 착각 역시 당신이 선택해서 생긴 착각이 아니죠. 연기적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그렇게 흘러가듯 일어난 겁니다. 그러니 그것이 비록 착각일 뿐이라도 착각 자체는 잘못된 게 아닙니다. 그 어떤 것도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게 없으므로 아무것도 잘못된 게 있을 수 없습니다. 강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렀다고 거기에 어떤 잘못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물이 흐르나요? 아니면 흐르는 게 물인가요? 사자가 노루를 잡아먹었다고 거기에 어떤 가치가 붙을 수 있을까요. 의미와 가치는 인간의 생각 속에만 존재합니다.


보는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듣는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고요. 경험하는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게 있었다면 경험하는 자를 경험할 수 있었을 겁니다. 경험은 그냥 경험으로 일어납니다. 누구에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그냥 경험 자체예요. 다만 거기에 '나'라는 생각이 찰떡처럼 달라붙을 뿐입니다. 그리고 태연하게, '내가 한다' '내가 듣는다' '내가 본다' 나... 나... 나가 꼬리표처럼 따라붙습니다. 이러한 꼬리와 이름 짓기는 현상 세계의 이원적 특성이라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나'라는 생각은 그야말로 생각 속에만 존재하는 개념입니다. '나'라는 생각이 없어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육체가 사라지지도 않아요. 그저 일어날 일은 일어납니다. 거기에 '나'를 개입해서 일부러, 굳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 모든 번뇌와 드라마를 만들어 스스로 어깨에 짊어지고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잘 못 됐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애초에 무언가가 잘못될 무엇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경험을 내가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내가 아니라고 백번 양보해도 이렇게 경험을 인식하고 있는 이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인식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요? 이것이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요?


인식이 일어나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식이 일어남이 ‘나’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건 아닙니다. 무엇이 무엇을 증명하는 모든 것은 사실이 아니라 추론입니다. 추론은 생각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유일한 사실은 경험 자체뿐이죠. 그 인식을 ‘나’가 하고 있다는 식의 이해 역시 추론입니다. 설명이 왜 필요한가요? 어떤 설명이 추가된다고 해서 그 ‘경험이 일어남’이 달리지는 게 있나요? ‘나’가 경험을 하는 경험의 주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또는 ‘나’가 경험의 주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경험이 일어남은 아무 상관없이 일어납니다. 당신의 유일한 경험은 말 그대로 경험뿐입니다. 경험되지도 않는 ‘나’를 어째서 경험자로 내세우려 하나요.


생각이 항상 그렇게 이끌죠. 머릿속 생각은 축구를 중계하는 아나운서와 같습니다. 아나운서가 아무리 상황을 해석하고 중계한다고 해도, 축구 경기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축구는 아나운서와 상관없이 진행됩니다. 그런데 내가 축구 중계를 한다고 착각하고, 내가 경기장에서 뛴다고 착각을 하면 얼마나 피곤할까요.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실수에 괴로워하고 모든 승리에 스스로 뿌듯해하며 몰입하게 되겠죠. 그리고 경기가 끝나감에 따라 ‘나’의 종말에 대한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지금 바로 당신에게 일어나는 직접적인 경험을 보세요. 그 직접적인 경험에 생각이 계속 들러붙어 해석하려 할 겁니다. 생각은 듬성듬성 건너뛰며 추론하고 짐작하며 이미 짜인 결론을 향해 돌진할게 될 겁니다. 그때마다 계속 지금의 경험으로 돌아와 이 모든 행위와 감각들에 주체가 있는지 살펴보는 겁니다. 생각하는 게 아니라 직접 보는 겁니다. 마치 옆에 누가 있는지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려 보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노력이 들지 않으며 아무런 생각도 필요 없어요. 이 모든 것의 주체를 찾기 위해 관심을 갖고 보는 것, ‘나’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 고개를 돌려 찾아보는 것, 그것이 해야 할 전부입니다. 쉽게 믿을 수 없겠지만 그렇게 단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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