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법과 존재성 이야기
세상을 가만히 살펴보면 참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유형 무형을 막론하고 세상에 나타나 있는 것들은 모두 특정한 조건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무지개가 우리 눈 앞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적정한 태양 빛의 각도와 습도가 필요합니다. 관찰하는 사람의 위치도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그뿐 아니겠죠. 지구의 자전과 공전 그리고 구름의 흐름도 잘 맞아떨어져야 바로 그 무지개가 출연할 수 있는 것이죠. 따지고 들어가면 그야말로 우주의 모든 것이 마치 돋보기로 초점을 모으듯 맞아떨어져야 이 무지개란 놈이 눈앞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중 어느 하나라도 빗나간다면 이 무지개는 모양이 다르게 나타나거나 아예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무지개는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존재하는 무엇이라고 여기진 않습니다. 대부분은 당장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존재성을 부여하지 않겠지만, 사실은 그보다 '특정 조건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 존재성에 대한 의문으로 작용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특정 조건이 있어야만 출현하는 그런 것들은 독립적인 주체성이 없기 때문에 존재라고 하기가 애매하다 이겁니다. 예를 들어 내가 차를 하나 샀다고 치죠. 그런데 이 차의 바퀴는 철수가 주인이고 문짝은 순이가 주인이고 엔진은 영희가 주인이고 등등.... 모든 것들의 주인이 다 따로 있다면 그런 걸 과연 내 차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어느 하나도 내 것이 아닌데 그것이 내 차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과가 하나 내 앞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무수하게 많은 특정 조건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짐작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그 조건들이 누락이 된다면 지금 내 앞의 이런 사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조건에 따른 다른 사과가 있게 될 겁니다. 결국 그 특정 조건들과 사과의 관계는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은 그것이 그냥 사과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 사과는 특정 조건들이 하나로 응축된 결과였던 겁니다. 사과라는 것은 그저 이렇게 생긴 것을 부르기 위한 이름일 뿐이고 실제로 사과라고 할 것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지금 눈 앞에 버젓이 보고 있는 이 사과가 사실은 사과라 할 무엇이 없는게 됩니다.
이것을 어떤 과거의 요소나 원인들이 모여서 지금 사과의 모습으로 드러났다고 이해하는 것으론 부족합니다. 지금 이 순간 사과를 그대로 보면, 이 사과의 형태를 유지시키기 위해 온 우주가 힘을 쓰고 있음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장 사과가 놓여있는 테이블이 없다면 사과는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고, 중력이 없다면 하늘로 올라갈 것이고, 기압이 지금 보다 높거나 낮다면 찌부러지거나 산산이 부서저 버릴 겁니다. 온도가 높다면 타버릴 것이고 낮다면 수축할 것입니다. 지구가 지금의 환경을 갖추기 위해서는 태양계와 우주의 맞물림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죠. 지금 이 사과 한 알이 눈 앞에 보이기 위한 특정 조건들은 정말 어마어마합니다. 이렇게 특정 조건이 맞아야만 이 모양으로 드러나는 것을 가만히 보면, 그것 자체의 고유한 성질이라는 주체성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사과는 사과일 뿐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사과라고 할 무엇이 없는, 그저 특정 조건에 의해 모양만 드러난 아주 신기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죠. 흔히 불가에서 말하듯 '겨자씨 안에 우주가 들어있구나'하는 말의 의미가 정확히 이런 의미입니다. 겨자씨 안에 우주가 있으면 겨자씨는 겨자씨인가요? 아니면 우주인 가요?
이렇게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것은 모양으로는 다 다르게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그 모양 자체로 존재성을 부여할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의 인식이 그 모든 대상들을 각각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무엇으로 분리해서 구별하고 인식하지만 알고 보면 그 구분들은 몽땅 허상입니다. 우리의 이원적 인식 구조상 사과가 따로 있고 책상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사과와 책상이란 것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마치 TV 속에 사과와 책상이 등장해도 그것들이 개별적인 게 아닌 것처럼 말이죠. 스위치를 켜면 나타났다가 스위치를 끄면 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특정 조건들이 딱 맞으면 나타났다가 그 조건들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집니다. 촛불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산소라는 조건이 사라지면 불은 꺼져버립니다. 정말 신기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연기법이라고 합니다. 다른 것들로 인해서 나타나는 무엇이라면 그것에는 존재한다고 할 만한 독립적인 주체성이 없다는 것이 바로 연기법의 의미입니다. 불교가 한마디로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당연히 연기법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아주 중요한 불교의 핵심입니다.
이게 단순히 사과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가 '나'라고 믿고 있는 이 육체는 어떤가요? 당장 이렇게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고 믿고 있지만 과연 그럴까요? 여기에 연기법을 들이대는 순간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요?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라는 것도 알고 보면 연기법과 같은 말입니다. 삼라만상이 연기라서 무아인 거죠. 무아, 즉 '나라고 할 것은 없다'는 말에서 '나'는 독립적인 주체성을 말합니다. 연기로 일어난 모든 것은 독립적인 주체성이 없다. 나만 무아가 아니라 삼라만상이 모두 그렇다는 겁니다.
이것을 그냥 머리로만 이해한다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반복적으로 제 글을 읽은다고 해서 어떤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 기존의 생각 방식(이원적)으로 이해를 하게 될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은 이미 짜인 생각의 패턴대로 사유를 하게 되죠. 스스로 실상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나야 그 패턴을 깰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아니 저 사과가 사과가 아니라는데, 저 사과가 마치 홀로그램 같이 모양만 존재하는 거라고 하는데, 저 사과가 실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데...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너무 궁금하고 미치도록 알고 싶을 때, 비로소 진정으로 삶과 행복에 한 걸음 가까워지게 되고, 그 힘이 결국 오랜 망상의 눈꺼풀을 벗기게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켜놓고 자리를 비웠더니, 지 엄마에게 혼난 딸내미가 나름의 복수로 제목을 저렇게 달아놨네요 ㅎㅎㅎ. '해나를 괴롭히지 말자'. 해나를 괴롭히지 않겠다는 기념으로 제목은 그냥 살려두렵니다. 나중에 지워달라고 애원해도 안 바꿔줄 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