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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말록 May 09. 2023

상대성 세계에서 개별적 존재의 가능성은 0%

제행무상, 제법무아

세상은 상대성 세상입니다. 세상이 상대성이란 것은 우리의 경험이 증명하죠. 만일 세상이 상대성 구조가 아니라면 우리의 삶의 경험은 결코 일어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식이란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인식이 가능한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은 상대성 구조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여기 검은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 점은 상대적 차별로 인해서 우리에게 인식됩니다. 즉 흰 배경이 없이는 인식이 불가능하죠. 이는 반대로 검은 점이 있기 때문에 흰 여백을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아주 간단한 예를 들었지만 사실 다른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별'을 통해서 인식 가능한 무엇으로 드러납니다. 


그것은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인식'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검은 바탕 안에 검은 점이 인식은 되지 않아도 존재는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평면적인 것을 예를 들어 그런 느낌이 들 수 있지만 이것을 입체라는 상황을 놓고 보면 더 쉽게 이해가 갑니다. 



위에서 예를 든 흑과 백은 위 그림과 같은 판화의 음각과 양각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양각만 있으면 인식이 불가능한 것과 같습니다. 좀 더 확대해서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디지털 정보의 예를 들어볼까요. 


디지털의 기본 모델은 0과 1입니다. 이는 숫자 0이나 숫자 1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름' 혹은 '차별'을 의미합니다. 즉, 인식의 기본 단위인 셈입니다. 흑과 백, 음각과 양각인 거죠. 이런 동일 구조를 통해서 현상세계를 그대로 시뮬레이션하는 3D 게임과 같은 것들을 구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성이란 말 대신 이원성이라는 말을 쓸 수도 있습니다. 보통 이원성이란 말을 들으면 ‘분리’를 우선 떠올리지만 사실 그 숨겨진 진짜 의미는 ‘인식 가능한 형태로 분화한 하나의 다른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분리된 듯 보이지만 결국 하나라는 말입니다. 분리된 듯 보이는 그 둘이 하나처럼 작용하므로 상대성이라고 말합니다. 


이원성이라고 해서 숫자 2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분리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다원성도 이원성에 포함되는 말입니다. 이원성과 분리될 수 있는 말은 비이원이라고 하고요. 우리가 이원성과 구분하는 개념으로 '하나'를 표현할 때 굳이 일원성이라는 말대신 비이원성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일원성'이라고 표현할 경우 '일원성'과 일원성이 아닌 것으로 또다시 분화되기 때문이에요. 


상대성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듯 보이는 대상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말이고 이원성은 분리에 초점을 맞춘 말이에요. 그러나 결국 둘 다 같은 말입니다. 상대성이란 말 자체가 '원래 하나'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서 이원성이라는 말보다는 더 쓰임이 좋아서 저는 '상대성'이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합니다. 


이 상대성 세계에서는 각각 개별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언뜻 전혀 상관없는 것들 같아도 서로 영향을 받습니다. 예를 들면 원근감 같은 것들이 대표적입니다. 즉 가까운 것은 크게 보이고 멀리 있는 것은 작게 보이는 것을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사실 이것은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구조를 드러내는 매우 특이한 현상입니다. 왜 굳이 가까운 것은 크게 보이고 멀리 있는 것은 작게 보이는 걸까요? 하나에 따라서 왜 굳이 다른 하나가 영향을 받는 걸까요? 


이것이 하나의 바탕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3차원 공간을 디폴트로 인식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어쨌든 관찰자와 관찰 대상이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면 결국 관찰자나 대상의 위치에 상관없이 그 크기는 동일하게 보여야 맞습니다. 세상이 2차원 적인 평면의 형태였다면 거리에 상관없이 크기는 동일했을 겁니다. 



상대성의 세상에서 개별적인 존재의 가능성은 0%입니다.  이런 말은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건 몰라도 '나'는 세상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떨어져 존재한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상대적이지 않은 무언가를 우리의 세상 안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개별적이고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대상은 오직 생각 속에만 존재합니다. 이건 그리 어려운 말도 아니죠. 모든 현상이 그것을 있는 그대로 가리키지만 어쩐 일인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전통적인 모델은 변하지 않습니다.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세계가 존재하고 그 속에 내가 태어나 살아간다는 모델 말입니다. 그러나 언뜻 분리돼 보이고 언뜻 객관적(절대적)으로 존재하는 듯 보이고 언뜻 이원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의 경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용케도 우리는 그 모든 증거들을 마법처럼 피하면서 객관적 세상에 대한 전통적인 모델을 유지하며 살고 있습니다. 기쁨 슬픔 성공 그리고 좌절의 드라마가 끊임없이 펼쳐지는 이유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을 살펴보면 좀 더 이해가 쉬울 겁니다. 양자역학도 그렇고 상대성 이론도 그렇고 기존의 세계에 대한 모델 위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하나의 고정관념만 내려놓으면 됩니다. 객관적이고 고정적이고 절대적인 물질적 세계에 대한 믿음 말입니다. 그렇게 열린 가능성의 상태로 세상을 바라보면 분명 우리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뒤흔드는 의식적인 혁명과 지혜가 드러납니다. 너무 거창하고 먼 얘기 같은가요? 사실은 전혀 거창하지 않고 여러분들과 아주 가까운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지금 이 순간에 그것을 바로 목격하고 계시거든요. 


이 이야기는 제 말이 아니라 2600년 전 '석가모니'의 가리킴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제행무상' '제법무아'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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