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게 아니라 익숙지 않을 뿐
나는 개인적으로 깨달음이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엉뚱한 이미지가 덧씌워져 지나친 신비감을 풍겨서 사람들에게 오해되고 어렵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신 깨어남 혹은 눈을 뜨다 정도로 표현하곤 하는데, 이 말 역시 뭔가 거창한 느낌을 피하긴 어려워 보인다.
이렇게 저렇게 표현을 한다고 해도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그러한 신비감을 걷어내고 조금은 논리적인 표현으로 바꾼다고 하면 결국 '생각의 막'을 걷어내는 일이다. 생각(개념)은 마치 우리가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볼 수 없게 만든다.
생각은 박제와 같다. 실제로는 절대 잡을 수 없고 가둘 수 없이 펄떡이는 무언가를 고정되고 생명력 없는 무엇으로 고정시키는 것이 생각이다. 생각은 무엇을 가리키긴 하지만 그 무엇 자체도 아니다.
문제는 이런 생각(개념)이 존재감을 만들어낸 다는 점인데, 존재감이란 다름 아닌 눈앞의 무엇이 존재성을 갖고 쭉 이어진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지금 눈앞의 사과가 방금 전의 사과와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존재감이다. 사과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방금 전에서 지금이라는 순간으로 이어져 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존재감이다.
이런 존재감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개념화'를 통해서다. 즉 생각을 통해서 이런 존재감, 그리고 이어진다는 것이 가능하게 됐다. '개념'이라는 박제를 이용하지 않으면 존재감을 지속시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끌고 올 방법이 없다. 비유하자면 마치 물을 맨손에 담아서 저쪽 동네까지 들고 갈 수는 없지만 얼음(개념)으로 얼리면 들고 옮길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런 생각의 막을 걷어내면 비로소 실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릴 적부터 해왔던 소꿉놀이처럼 개념 놀이를 계속해 왔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눈앞의 사과가 진짜 사과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사과가 사과가 아님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말이 또 신비한 느낌을 자아내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이 본래 모습이다. 오히려 신기한 것은 버젓이 눈앞에 진실을 두고 잠꼬대하는 몽유병 환자들처럼 우왕좌왕하는 그 모습이 시비하다만 신비한 일이다.
방금 전의 사과가 지금의 사과라고 과거로부터 끌고 온 존재감은 생각(개념) 때문이다. 이 생각의 막을 통해서 보는 세상이 지금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세상의 이야기다. '나'라는 인간이 지구라는 행성에 세상에 태어났고 부모의 보살핌으로 잘 성장해서 열심히 살다가 나이가 들고 늙고 병들고 죽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 자체가 이미 '개념'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 모든 우리의 이야기 역시 생각이고 개념이란 의미다.
여전히 신기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다른 것은 다 공부해도 내 '생각'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