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법과 자체성 없음
이것이 있어야만 저것이 드러난다는 것, 태양과 나무가 있어야 나무의 그림자가 드러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림자는 그 자체로 자체성이 없다고 말한다. 자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의 도움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라는 말과 동일하다. 그래서 자체성이 없다는 말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말과 같다.
그런데 우리가 대충만 생각해봐도 그런 자체성을 갖고 있는 독립적인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나무와 태양 빛으로 드러나는 그림자처럼 그 스스로 존재하는 것 단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눈앞에 사과가 있다고 치자. 이 사과가 드러니 위해서는 빛이라는 것과 공간이라는 것을 필요로 한다. 사과라는 것이 생기는 과정을 살피지 않더라도 지금 이 순간 관찰되는 모습조차 다른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과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이 말은 사과의 자체성이 없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이 자체성이 없다는 것의 의미를 달리 표현하면,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여기가 아주 중요한 지점이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눈앞의 사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이 중요한 지점이 오해의 시작이다.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그러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바로 '생각(개념)'을 말한다. 사과를 말하다가 왜 갑자기 개념 이야기를 꺼내는가?
눈앞에 사과를 분명히 보고 있지만 당신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지 못하다. 그것의 모양을 인식하긴 하지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닌 생각(개념)을 씌워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존재'에 대한 착각이 일어난다. 그것이 가능한 유일한 이유는 개념을 통해서 보기 때문이다. 개념 역시 독립적으로 홀로 서지 못하지만 마치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착각을 만들어 낸다. 개념을 걷어내면 그것은 더 이상 사과가 아니다. 편의상 사과라고 부르긴 하지만 자동차를 보고 '밥'이라고 지칭하는 것만큼 이질적이고 임시적이고 인위적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자체성이 없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가? 있다면 좀 더 탐구하길 바라고, 없다면 이제는 인정해야만 한다. 세상에 자체성을 가진 무엇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즉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할 때 주목해야 할 단어는 '그런 것'이다. 그게 무엇인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런 것은 눈앞에 인식되는 그것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 앞을 가리는 '개념'을 말한다. 당신이 사과를 보면서 그 사과가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것은 사실 그 모양을 가진 그 '사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이 지점을 잘 살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1초 전의 사과와 지금의 사과가 같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체성이 없고,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는데, 1초 전의 사과와 지금의 사과를 이어지게 하는 '존재성'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어진다는 말속에는 이미 존재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가? 존재성이 없는 것이 이어진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 과연 1초 전의 사과와 지금의 사과는 같은 것이 맞는가? 존재성을 가지고 쭉 이어진 것이 맞는가?
이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자체성이 없다. 왜냐하면 무엇인가에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기본적인 구조 때문이다. 항상 무언가에 의지해서 일어나고 인식된다. 이 자체성이 없다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면 바로 우리의 생각(개념)의 막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관찰은 자체성이 없지만 우리의 생각은 자체성이 있다고 믿는다. 여기에서 생기는 간극이 바로 여러분들을 자유롭게 할 진실의 골짜기가 드러나 있는 곳이다.
눈을 떠서 보는 세상은 그래서 싱그럽다. 한순간도 고정된 것이 없이 펼쳐지는 신비한 장관이다. 항상 보고 있으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그러한 세상에 지금 이 순간 당신과 내가 한 치의 다름없이 마주하고 있는 진실이다. 나는 보는데 당신은 못 본다? 결코 아니다. 나도 보고 당신도 본다. 유일한 차이는 이원적 생각의 막을 통해서 보는가 아니면 있는 그대로 보는가만 다를 뿐이다.
1. 세상 모든 것이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나무에 드리워진 그림자 같다는 것을 확인하고
2.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통해서 '자체성'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3. 자체성이 없다는 진실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런 것이 '존재'하는 듯 여겨짐에 의문을 품고
4. 이런 착각이 바로 '생각'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여
5.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생각'으로 바라보는 것의 차이, 즉 그 간극을 인식하면
6. 비로소 눈앞의 실상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