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삼아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자면 책을 많이 읽었던 계기는 서울살이라는 지옥철과 긴 통근시간을 강요하는 물질적 토대 덕분이었다. 편도로 최대 1시간 반, 왕복으로 3시간이 걸리는 출퇴근길에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어 책을 본격적으로 읽었던 것 같다. 처음으로 한 해 161권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그다음 해 인구 20만 명의 소도시로 발령이 났다. 나는 서울 생활을 정리했고 아내와 함께 근무 지역 인근에 전세를 얻어 살고 있다. 매일 소모되는 통근 시간이 극적으로 짧아져 삶의 여유가 생겼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책을 훨씬 많이 읽을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그런데 삶의 터전을 바꾼 그해 110권을 읽었다. 이후 다시 한 해가 흘러 올해는 반년이 다 되어가는데 25권 정도 읽었다. 실로 엄청난 독서량 감소가 아닐 수 없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올해 꽤 두꺼운 책을 많이 읽긴 했다. 하지만 이는 변명이 될 수 없다. 실제로 적게 읽은 것은 나 자신이 더 잘 아니까 말이다. 책을 읽는 좋은 습관을 방어하기 위해 퇴근하면 읽어보려고 근사한 모양의 독서대도 주문했다. 하루 이틀 효과가 있었지만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고 장식처럼 방치되었다.
신경과학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뇌의 습관은 선조체* 영역에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 습관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듯이 나쁜 습관인 경우 노력 없이 자연스레 형성된다. 이를테면 과식, 담배, 게임 등 중독적인 쾌락 보상체계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반대로 좋은 습관이라 불리는 것들은 의식적인 노력이 수반된다. 왜냐하면 수행하는 데 있어 즉시 보상은 없고 통상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매일 책을 읽어야 하는 학자나 작가를 제외한 일반인 중에서는 독서를 꽤 했다는 생각을 했지만 여전히 내게 독서라는 활동은 지루함을 가져온다. 아무리 재미있는 책이라고 하더라도 솔직히 긴 시간 집중하기 어렵다. 신경학적으로 볼 때 인간에게 집중이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때 구글 시계로 유명한 뽀모도로 학습법이 유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조체는 대뇌 기저핵의 일부로, 운동 제어, 인지, 보상, 동기 부여 등에 관여하는 중요한 뇌 영역입니다. 특히 대뇌피질과 선조체로 연결된 신경 회로는 강박증과 같은 질환과 관련이 있으며, 선조체의 미세 구조 변화가 뇌 질환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합니다. - Google Search Labs
게다가 나쁜 습관은 지워지지 않고 선조체 속에 거의 반영구적으로 기억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스갯소리로 담배는 끊는 게 아니라 계속 참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실을 반영한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원래 인간은 책 읽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선언하고 겨우 이룬 습관을 버려야 할까? 그에 앞서 나의 습관이 무너지는데 걸린 시간을 생각해 보았다. 나의 경우 정점을 지나 붕괴되어 가는 과정이 1년 정도 걸린 것 같다. 내게는 결정적 계기가 있었으니 성경 통독이다. 무신론자이지만 서양 문명의 두 기둥 중 하나인 기독교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통독에 도전했다. 다른 책도 병행 독서했기에 성경 통독을 끝내는 데 반 년쯤 걸렸다. 그러는 사이에 매달 읽는 책의 권수가 현저히 떨어졌다. 성경을 막상 다 읽고 모래주머니를 떼어낸 심정으로 편하게 읽을 거라 기대했지만 이후 책을 읽지 않는 것이 더 편해졌다. 책 읽는 권수라는 나만의 보상 체계가 실적 저하로 망가진 셈이다. 마라톤에 참여해서 잠시 쉬었다 다시 달리려고 했지만 전부 앞서가고 차량 통제도 풀린 채 나 홀로 도로에 남은 것 같은 적막함이 느껴졌다.
뇌과학의 측면에서 습관을 갖추는데 대략 45일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작심삼일보다는 훨씬 긴 시간이다. 하지만 한 번 구축된 습관을 무너뜨리는 것 역시 쉽진 않다. 왜냐하면 이렇게 나의 나태함을 안타까워하는 것 봐선 다시 책 읽기 습관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젠가처럼 스스로 무너뜨리고 쌓아야 하는 것이 좋은 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