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나는(3/3)

by pathemata mathemata

내 이름을 부른 사람이 전혀 기억에 없는 20대 중반의 여자였기 때문에 살짝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긴 머리에 큰 눈과 큰 키가 인상적이었다. 이름을 모르는 여자는 추위 때문에 제 나이에 걸맞은 디자인의 검은색 숏 패딩에 바다 바람에 조금은 추워 보이는 롱 원피스를 걸치고 있었다. 문제는 그녀는 나보다 15살은 어린 것 같은데 반말로 내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다. 나는 이상한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제법 나이를 먹었을 거라 예상은 했는데 그래도 아직은 알아볼만하네."


"나를 아세요?"


"그럼, 나는 잘 알지. 우리 대학 때같이 수업 들었잖아."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살짝 터뜨렸다. 나이 차이로 볼 때 나와 그녀는 교수와 제자의 관계인데 안타깝게도 나는 교수인 적이 한 번도 없다.


간간이 내가 서 있는 위치를 일깨워 주는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주변에 그녀 외에 아무도 없어 추위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내가 그쪽과 수업을 같이 들을 리가 없잖아요. 어떻게 제 이름을 아시지요?"


나는 범죄에 연루되는 것이 내 삶의 마지막이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평온한 편이었던 삶이었는데 갑자기 장르가 스릴러로 전환되는 것일까?


"아, 정말 서운하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다니."


그녀는 머리를 쓸어내리면서 짓궂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나와의 간격을 좁혔다. 그녀와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나는 확실하지 않지만 불현듯 그녀가 누구인지 알 것만 같았다. 이제는 현실인지 꿈인지 그 경계에 서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 저랑 무슨 수업을 같이 들었지요?"


"인문대에서 교양으로 철학 수업을 같이 들었지."


실제로 나는 철학 학점을 필요 이상으로 이수해 졸업증서에 부전공이라고 적혀있다. 말도 안 되지만 그녀의 말에 신빙성이 생겨난 듯 재차 추궁했다.


"수업 과목이 뭐였나요?"


"정확히 기억 안 나지만 동양철학 수업을 들었지. 초기 불교사상 같은 것. 이제 내가 기억나니?"


그녀는 내 집요한 질문에 웃음기를 잃지 않고 답했다. 생각해 보니 대학 시절 비슷한 수업을 들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 졸업 증명서 같은 것을 어둠의 경로로 얻었다면 충분히 답변 가능한 질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녀가 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무언가는 없다. 내 개인 명의로 된 재산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통장 잔고는 언제나 카드값과 아내에게 주는 생활비, 대출 원리금 상환액 등이 지나가면 0에 수렴해 있다.


생각에 골몰하는 바람에 침묵이 길어졌다. 그 사이를 비집고 그녀가 말을 이어나갔다.


"유위변전(有爲變轉)이라는 단어 알지? 세상 일은 인연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 너 역시 세상의 일부라서 뜻하지 않게 변한 것을 알고 있어."


찬찬히 다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녀가 누구인지 확실히 기억이 났다. 나는 말문이 턱 막혔지만 애써 침착하게 답변했다.


"내가 기억하는 게 맞는다면, 넌 어떻게 그대로일 수 있지? 내 생각엔 나와 나이가 같지 않았나? 우리가 헤어진 지 20년도 더 지난 것 같은데."


"맞아. 내가 다른 사람에 비해 많이 동안이긴 하지." 그녀가 활짝 웃었다.


나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지만 그녀의 눈매에도 40대에 걸맞은 처연한 주름 하나 보이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그녀는 20대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멀리서 흥겨운 트로트 곡조가 흘러나왔다.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Amor Fati). 12월 해변에서 지역축제 행사를 할 리도 없는데 나의 귀에는 그 곡조가 맴돌았다.


"눈물은 이별의 거품일 뿐이야, 다가올 사랑은 두렵지 않아."


짧은 사이에 그녀의 비범한 영원한 젊음에 감탄하는 것도 멈춘 채 이 유행 가사에 어떤 뜻이라도 부여되어 있는지 곱씹어 보았다.


"민호야, 내가 너와 만나기 전 다시 20대로 돌아간다면 어떨지 생각해 보았어. 그때의 내가 지금의 너를 우연히 여기서 만나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네." 그녀가 아까와 달리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무언가 답을 하려고 했는데 모든 것이 일순간 멈춘 듯 보였다.


"동영상 생성 한도에 도달했습니다."


이것이 나의 사세구((辭世句, 마지막 말)이다.

월요일 연재
이전 08화다음날, 나는(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