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저나 약속이라면서, 이제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아직 만나려면 30분 정도는 남았어."
"그러면 저녁 약속이겠네. 만나는 사람이 누군데 그래? 말하기 좀 그런가?"
"아, 거래처 직원이야." 진욱은 약간 다리를 떨며 말했다.
"난 충분히 걱정했으니 더는 말 안 할게. 그나저나 딸 이랬지? 이제 몇 살이지?"
"5살이야. 이제 영어유치원 다니기 시작했지."
"아, 4세 고시 당당히 합격했나 보구나. 영어학원 나는 애가 있어도 절대 못 보낼 정도로 비싸다면서? 역시 너 정도 재력은 돼야 가능하구나. 다 좋은데 너도 애한테 하원하면 영어로 이야기해야겠구나?" 웃으면서 던지는 성진의 말에는 순수한 사르카즘이 담겨 있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나를 닮지 않고 아내를 닮아 어학에 재능이 있나 보더라." 진욱은 정물화를 그리는 대상인 양 맥주캔을 골똘히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딸 자랑하는 것 보니까 너도 아빠는 아빠구나." 성진은 의미 없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나저나 너는 이제라도 결혼하거나 그럴 생각은 없어?" 진욱이 성진의 표정을 살피며 이야기했다.
"벌이도 시원찮은데 거울을 보니 아저씨 한 명이 서 있더라고. 살도 쪄서 그냥 혼자가 편하네."
"내가 회사 여자 후배라도 소개해 줄까? 언제든지 말만 해."
"글쎄, 회사 다니는 여자가 미쳤다고 나를 만나겠어? 말이라도 고맙다."
"그래, 나 이제 가봐야겠다." 진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맥주 안 먹을 거면 나 주고 가라. 멀리 안 간다. 나중에 연락할게." 진욱의 연락처가 그의 핸드폰에 남아있는지 확실하지 않았음을 문득 깨달았다.
진욱이 가고 성진은 남은 맥주를 비웠다. 5분 정도 간격을 두고 그가 남기고 간 맥주를 들고 편의점을 나섰다. 국밥이라도 사 먹으려다가 저녁은 귀찮아 건너뛰기로 했다. 그가 사는 원룸 앞 현관문에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었는데 문득 허리께에서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등 뒤에 바짝 따라온 누군가가 있었다. 하지만 성진은 별일 아닐 것이라 자위하며 서둘러 문을 열었다.
성진은 평소와 같이 엘리베이터로 직행하려다 말고 비상계단이 있는 문으로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문을 쾅 닫고 비상계단 2층에서 잠시 멈춰 아래층을 살폈다. 그를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1분 정도의 시간을 갖고 그 자리에 멈춰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지만 별일은 없었다. 성진은 비로소 안심하고 305호인 자신의 오피스텔로 걸어갔다.
그런데 다시 누군가 걸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성진의 맥박이 크게 뛰었다. 뒤를 확 돌아보니 거기에는 진욱이 멋쩍게 웃고 있었다.
"약속이 갑자기 취소되었는데, 잠깐 들어가도 될까?"
"너, 그냥 온 거 아닌 거였구나. 용건이 뭔데?" 성진은 5미터쯤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그를 다시 한번 자세히 살폈다. 다행히 그는 빈손으로 보였다.
"내가 너한테 꼭 확인할 것이 있어서 그래."
비좁은 오피스텔 복도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간 성진은 공포심보다 수치심이 더 많이 차올랐다.
"들어와." 성진은 체념하듯이 비좁은 오피스텔 문을 열어 그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믹스커피라도 줄까? 먹을 것이 그것밖에 없다." 진욱은 대답 없이 그저 고개를 저었다.
진욱은 잠시 현관 앞 쪽 그의 화장실에 들렀고, 오피스텔에 딸린 작은 식탁에 이윽고 둘은 앉았다.
"할 말이 뭔데 여기까지 나를 미행한 거지? 난 너한테 빚진 게 없을 텐데." 성진은 싸늘하게 말하며 부엌칼 위치를 가늠했다.
진욱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너 내 결혼식에 왔지?"
"당연하지, 그때 절친이었으니까 내가 너 사회는 안 봤지만, 축의금도 100만 원은 한 것 같은데."
"그런데 그때 왜 내 결혼식에 온 거야?" 진욱은 성진을 노려보았다.
"지금 장난하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이야기해." 성진도 그를 똑바로 쏘아 보았다.
"네 머리카락 한 줌을 얻으러 왔어. 그게 전부야."
"그래서 방금 화장실을 뒤진 거야? 무슨 미친 짓거리인데?" 성진은 벌떡 일어서 진욱을 당장이라도 때려 눕힐 것처럼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진욱은 그를 올려다보며 이야기했다.
"은하수를 본 적 있어? 서울 밤하늘도 예전에 군사정권에서 통금하던 시절에는 불을 다 꺼서 은하수를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더라. 은하수 직관하려고 한밤중에 유명한 강릉 안반데기까지 간 적도 있었는데, 잘 안 보여서 꽤 실망했지."
성진은 해석이 불가능한 암호문으로 가득 찬 비석처럼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 내 딸 이름이 은하야. 네가 본 적 없었길 바라고 앞으로도 볼일 없을 것 같아."
진욱은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마치고 성큼성큼 오피스텔을 걸어나갔다. 그의 검은 티셔츠에 붉은색 기운이 감도는 것 같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