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themata mathemata Apr 27. 2023

멋진 사파리월드(Brave Safari World)

에버랜드 동물원 사파리월드 방문기


용인 에버랜드에는 사파리월드라는 차로 맹수들을 관람할 수 있는, 호랑이와 사자의 싸움으로 유명한 시설이 있다. 사파리(safari)의 뜻은 아랍어로 여행, 정확히 말하면 동물 사냥 여행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그 의미가 단순한 관람으로 변형된다.


작년에 기업 이벤트 참여로 받은 에버랜드 입장권이 생겼다.  잊고 있다가 유효기간이 지나기 전에 티켓을 발견하여 월요일에 회사 휴가를 내고 아내와 함께 갔다. 나는 대기 줄이 긴 놀이 기구는 질색인 편인데, 사파리월드가 바로 그런 유에 속했다. 평일인데 대기시간이 150분으로 표시되어 두 눈을 의심하게 했지만 '설마 그 정도 걸리겠어.'라는 안이한 생각에 그 대열에 합류했다. 경험칙은 무시 못 하였다. 대체로 그 정도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무료함을 달래느라 평소에는 잘 안 읽히던 전자책을 절반이나 읽을 수 있었다.


사파리의 어원을 검색하다 발견했는데 사창가 은어로 '사파리'는 애인 관계의 여자가 남자를 졸라 사창가를 지나가며 구경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고 한다. 창녀들은 원초적인 성욕을 이용해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거리낌 없이 신체를 파는 자신이 동물원의 동물처럼 여겨졌을 테고 이러한 자신을 구경하는 (한 남자에게 구속된) 여자의 우월감을 사파리라고 표현함으로써 조롱한다. '나를 창녀라고 멸시하며 구경하는 가 우월한 것 같지? 너도 본질적으로 나와 같아.'


대기시간이 너무 길어 앞서 말한 사파리 구경하는 여자처럼 나 역시 대기하는 사람들을 구경하게  되었다. 나 역시 무료한 수많은 이들의 구경 대상이 되었으리라. 젊은이들 중 몇몇은 텔레토비, 조커, 할리퀸 등 다양한 코스프레를 하고 기다렸다. 내 앞에 아이를 데리고 온 이모로 보이는 사람은 천방지축 날뛰는 통통한 초등학생을 제지하느라 앙칼진 목소리를 뽐내었다. '아이의 부모는 어디 간 걸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내 앞에는 덩치가 좋은 아저씨가 어린 딸과 함께 서 있다. 그런데 나중에 아내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부녀 간의 대화는 온통 영어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앞에는 아저씨의 부모, 딸에게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데면데면한 느낌으로 줄을 섰다. 아마도 꽤 오랜만에 한국에 찾아온 아들과 손주일 것이다. 그들을 보니 선원이 직업이었던 나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나 역시 그와 함께 한 시간이 영 어색했었다. 작고하신지 3년이 되어가는데 아버지가 살아계신다면 나도 어색한 줄 서기를 같이 하였을까?


중간에 아내가 급하게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여 잠시 나 홀로 줄을 섰다. 나 역시 화장실에 가고 싶었지만, 특정 시점이 지나면 화장실 다녀오는 합류마저 금지하는 것이 사파리월드의 법칙이다. 인간의 배변 욕구를 통제하여 동물보다 가혹하게 사육하는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는 태어날 때부터 세뇌와 화학요법으로 생각을 통제당하는 인류의 미래가 그려진다. TV에 자주 나오는 동물을 보겠다는 욕망은 역설적으로 인간을 기다림의 노예, 가축으로 만드는 것이다.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한다는 암시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조금 놀랍기도 하다.


방광염의 위험이 증대될 무렵, 클라이맥스에 다다르게 되었다. 드디어 SUV 뒤에 실린 투명 강화유리 트램에 탑승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준비 소홀 탓을 해야겠지만 탑승 직전 진행요원의 외침으로 Q-Pass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에버랜드 안의 면죄부인 Q-Pass를 꽤 비싼 돈을 치르고 얻으면 사파리월드를 포함한 인기 놀이 기구를 기다림 없이 탑승할 수 있다.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있는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을 상기시키는 순간이었다.



막상 트램을 타서 맹수들을 보니 이들은 야행성임을 상기시키게 되었다. 오후 4시의 나른한 햇살 아래 사자며, 호랑이 모두 달콤한 시에 스타(siesta, 낮잠)를 즐겼다. 이들의 졸음을 방해하는 것 같아 미안할 지경이었다. 문득 이 평온함이 우발적인 투명 유리가 금이 가면서 동물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하여 관람객들이 핏빛으로 물들이는 상상을 해보았다. 오늘날의 창녀는 과거에는 남자친구와 사파리를 하며 도덕적 우월함에 취했다. 나를 포함한 관람객들은 이들의 압도적인 힘과 야수성을 한갓 조롱거리로 전락시켰다. 그 끔찍한 사고의 기회가 오지 않길 기도하다 보니 짧은 투어는 거의 막바지에 도달했다.


이 멋진 사파리월드의 마지막은 곰 사육장인데, 물놀이를 지나치게 좋아한 어떤 곰은 본래 갈색 털이 조금 바래버렸다. 면도, 제모, 파마, 커트 등 다양성을 중시하는 우리 인간들에게 곰의 나태함과 탐닉에서 비롯된 탈색은 우스운 일일 수 있겠다. 다만, (집이나 회사라는) 비슷하게 갇힌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가득 탄 트램은 눈길조차 보이지 않고 느긋해 보이는 곰의 뒷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원하는 것을 주겠다는 대왕에게 햇볕을 가리지 말고 항의한 디오게네스처럼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이사를 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