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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emata mathemata May 05. 2023

어린이날엔 <오이디푸스>지!

오이디푸스와 프로이트

출산율 0.78의 나라, 3일 만에 시가총액 8조 원을 날려버린 SG 증권 사태보다 더 큰 재앙이 기다리고 있다. 국민연금 폰지사기도 이제 들통이 날 테니까 말이다. 얼마 전 읽었던 누리엘 루비니의 <초거대 위협>에서는 미국의 고령화에 따른 부양인구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고 현대의학의 발전이 가져온 문제점을 제시했다. 루비니, 그러니까 닥터 둠은 2030년이 넘어가면 미국인 젊은이 3명에서 2명이 노인 한 명을 부양한다고 걱정하는데, 우리나라는 그 반대임(한국인 젊은이 1명은 노인 2~3명을 부양해야 한다!!)을 알면 기우에 불과할 것임을 깨달을 것이다.(미국 출산율은 2020년 기준 1.64이다.) 심지어 우리나라는 지하철도 무임승차에(서울교통공사 2021년 기준 누적 적자 17조 원) 노인에게 운임을 부과하면 25% 이상 손실을 보전할 수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북미 인디언들이 말한 '이 땅은 후손들에게 빌려서 산다.'라는 생각 따윈 없고, 오늘만 사는 나라이다.


출산율 이야기를 꺼낸 건 오늘이 어린이날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라는 개념은 중세에는 없었다고 하는데, 최근엔 반론이 좀 많다. 하기야, 과거 사람들도 유전자가 사실상 동일한데 어린이들을 어른 취급했을 리 만무하다. 다만, 조혼(빠른 결혼)에 따라 10대부터 어른의 범주에 들어갔을 것이다.


19세기에 유럽에서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이 발전한다. 그리고 우리는 유명한 프로이트를 만나게 된다. 프로이트로 인해 유아기가 성인의 정신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가정이 들어서게 되고, 이러한 사고는 유년 시기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결국 '어린이를 보호해야 한다.'라는 사회 관념에 일조하게 되었을 것이다. 일종의 진화론적 가설인데, 폭력적이고 반사회적인 부모 아래 가정환경은 결국 범죄자를 양산하게 되기에 자본주의의 입장에서는 가정에서 키워지는 아이들의 사회화가 중요했을 것이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가정은 이른바 '저수지'의 개념을 담당하게 된다. 감옥을 닮은 학교, 병영을 거쳐 공장으로 소중한 일꾼들을 투입하려면 정상의 아이들이 가정 안에서 저수지(이를테면 가두리양식장)에서 키워져야 한다. 장애인, 반사회적 인물(은둔형 외톨이 등)은 사회에 노출되지 않고 최대한 가정 안에 은폐되어야 한다.


이렇듯 어린이는 새 나라의 예비 일꾼으로 자라나면서 100년 넘게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다. 2000년 이후 선진국에서는 급격하게 출산율이 줄어들게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례적이고 압도적으로 출산율이 수직낙하한다. 이에 대한 원인을 기존의 성담론, 정치, 경제적인 관점이 아닌 전지적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이야기해 보자.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따르면 아이는 (원시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뺏어가고 자신을 거세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증오를 갖게 되지만 결국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극복한다. 이러한 아버지 역할을 초자아라고 부르게 된다. 라캉으로 대입하면 거울 단계,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전환이다.  


그런데  초자아의 성장 가능성은 우리나라에서 딱히 기대할 것이 없다. 아버지, 가부장제의 권위가 거의 땅바닥으로 실추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ATM으로 취급당하며 존중 없이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이의 초자아(도덕감정)의 발달이 약화됨은 결국 이드(생물학적 자아)의 지나친 발전을 가져온다. 결국 공동의 선이 아닌 자기만족에 몰두하게 된다. 여기서 힌트가 나온다. 아이는 계속 아이로 머물게 된다. 그리고 그 아이는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가진 영원한 아이의 지위를 포기할 수 없으므로. 따라서 우리나라의 어린이날은 어린이가 아닌 어른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아이 같은 우리는 부모를 대신해 자신을 위해 (성인) 장난감이라도 사주길 바란다. 오늘은 어린이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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