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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세웅 May 29. 2021

씩씩하게 걸어가다 보면

무엇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가

기본 3시간 이상 걸리는 심장 수술을 받은 환자가 중환자실로 들어온다. 늘 그랬듯이 여러 명의 의료진들이 의식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환자 곁에 다가가서 각자의 역할을 잘 수행한다. 심장을 잘 뛰게 하는 약물을 투여하고, 환자가 불편할까 봐 의식을 진정시키는 약물을 쓰고, 인공호흡기 치료도 병행한다. 환자의 상태에 따라 수술 당일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기도 하고, 다음 날 아침에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기도 한다. 그렇게 기운을 차린 환자분들은 물도 마시고, 죽도 먹으며 나중에는 정맥주사 하나를 가지고 일반병동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다시 빈자리로는 심장 수술을 받은 또 다른 환자로 채워진다.


환자에 대한 사랑과,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으로 자리를 지키며 일을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과 긴급하고 중요한 일들이 몰리는 업무 환경 상 마음의 여유는 곧잘 줄어들고 마치 삼시세끼 밥먹듯이 하루에도 번아웃을 여러 번 경험한다. 특히 최근에는 중증도가 높은 환자분들이 많아지고, 밥 못 먹고 일하는 게 당연해졌고, 자연스레 동료들의 마음에도 타인을 수용할 여유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나 또한 번아웃의 정도가 너무 심해져서 동기부여가 잘 되지 않고 시야가 참 많이 줄어드는 나날들이었다.


안 좋은 일은 왜 몰려서 오는지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가파르게 치솟는 중증환자 앞에서 점점 지쳐갔고 또 어떤 날에는 더 이상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혹한 광경을 보고 탄식 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입을 벌리고 '이렇게 좋지 않은 환자의 상태를 어떻게 더 좋아지게 할 수 있고 살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며 나를 덮쳐오는 불행의 파도를 오롯이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침대 시트와 바닥을 흥건히 적신 피, 병원에 있는 피를 모두 끌어다 쓴 것 같았던 그날, 총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뿐 전쟁터와 같았던 1분 1초는 나와, 동료들의 마음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 이식 수술이 잡혔다는 소식이 들렸다. 심근염, 이 무서운 병은 한창 학교에서 공부하며 꿈을 꾸고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을 한 학생에게 찾아와 심장을 멈추게 했다. 심장과 폐의 기능을 보조해주는 장치를 몸에 달고 기약 없는 날들을 버티느라 학생의 손과, 발 끝은 점점 색깔이 변했고, 여전히 의식은 돌아오지 않은 채 힘든 시간을 통과하고 있었는데 감사하게도 심장이식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수술이 끝난 새벽, 심장 이식을 받은 학생을 태운 침대가 중환자실로 들어왔다. 아직 사용하는 약도 많고 맥박, 혈압, 산소포화도 등을 주의 깊게 보며 치료를 해야 했지만 그래도 다행이었다.


밤낮 구분하지 않고 학생 곁을 지킨 동료들의 헌신과, 학생을 걱정하며 매일 중환자실 앞에서 기다리시는 부모님의 마음이 전달된 것인지 학생은 눈을 떴고, 의식이 돌아와서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 나는 당장 몇 초도 불편해서 견디기 힘들었을 인공기도를 학생은 삽입한 채 불편한 내색조차 하지 않고 잘 버텨주었고 침대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도 학생은 눈을 질끈 감으며 견뎌주었다.


"우리 학생, 엄청 씩씩하네. 잘 견뎌줘서 고마워. 최고야."


관장을 하고 나서 용변 간호를 하다가 시니어 선생님이 학생에게 말을 건넸다. 그 말을 듣는데 엄마가 자녀의 마음을 헤아리고 격려하고 안아주는 마음이 느껴져서 가슴 한편이 뭉클해졌다. 마치 어렸을 때, 엄마에게 "우리 아들 씩씩하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감정이랄까. 다시 학생을 바라봤는데 침착하게 상황을 견디는 그 모습이 정말 씩씩했다. 다 이해되지 않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씩씩한 태도로 치료를 잘 견디고 있는 학생의 모습을 보며 나는 또 배웠다. 나 역시도 지치고 방황할 것이 아니라 환자 곁에서 씩씩한 태도로 함께 있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스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떻게 하면 학생   위로할  있을까 고민하다가 학생의 눈에 띄는 곳에 가족사진도 걸어두고 부모님이 전달해주신 오디오를 통해 라디오도 틀어주었다. 그리고 나와 동료들은 학생의 눈높이에 맞춰서 대화를 이어가려 노력했다. 그러다가 학생이 좋아하는 것을 알아냈는데 NCT라는 그룹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NCT 처음에 듣고  알아듣지 못해서 MCT분유인가( 정도면 직업병이다.) 오해를 했지만 학생  좋아할 만한 아이돌 그룹이었다. 잠깐 시간을 내서 부서에 있는 아이패드를 손에 들고 NCT 나오는 뮤직비디오와 무대 영상을 틀어주었는데 같이 보고 듣다 보니 노래가  괜찮게 들렸다. 그중에는 휘파람 소리가 감각적으로 들리는 노래가 있었는데 Make a wish라는 곡이었다.


"계속 듣다 보니까 내가 듣기에도 NCT 노래 좋은 것 같아."


학생은 나의 짧은 감상평을 듣고선 눈으로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중환자실에서 처음 보는 학생의 웃는 모습이었다. 이럴 때 보면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는, 영락없는 학생인데 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어린 나이에 심장병을 앓는 네 모습이 내 마음을 참 아프게 했는데 네가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질병 앞에서 당장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없고, 그래서 때론 무력해지기도 하고, 예전과는 차원이 다른 앞으로의 삶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우리 함께 씩씩하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다 보면 또 다른 어려움도 극복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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