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태 선교사님 이야기
"파김치!"
책의 첫 문장은 파김치로 시작된다. 파김치는 닥터 박(Doctor Park)이란 뜻의 몽골어로, 박관태 선교사님의 성인 'Park'에 의사를 뜻하는 'Emchi'가 붙어서 된 말이다. 원래는 '팍임치'이나 연음법칙에 의해 '파김치'로 소리 나는 것이다. '파김치' 박관태 선교사님은 복강경 수술로 유명해졌는데 이런 그에게도 아찔한 의료사고를 경험한 순간이 있었다.
'전도하겠다고 데려와서는 의료사고를 냈으니, 하나님 얼굴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치료할 자신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 도와주세요.'
재수술을 한 이후에도 환자가 호전되지 않자 박관태 선교사님은 환자에게 솔직하게 사실을 고백한 후 기도 외에는 방법이 없으니 같이 기도해 보자며 환자의 손을 잡고 아침저녁으로 통성으로 기도했다.
'기도만 가지고는 안 되겠어요. 성경도 같이 읽어 볼래요?'
환자도 위기를 느꼈는지 하루 만에 신약을 완독하고 3일 만에 성경을 다 읽었다. 그러던 중에 기적같이 환자의 상태는 호전되었고 그 환자는 나중에 박관태 선교사님이 사역하시는 교회에 나와 양육받고 좋은 리더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박관태 선교사님에게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데, 이 날 이후로 한 건 한 건 조심해서 수술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천 건의 복강경 수술을 했지만 단 한 건의 사고도 내지 않게 되었다.
로제타 홀을 통해 깨달은 두 가지 은혜
하나, 로제타 홀이 젊은 나이에 선교지에서 남편과 딸을 잃고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남을 수 있었던 데는 남편 제임스 홀의 영향이 컸다. 그가 남긴 여러 편의 편지들이 로제타 홀의 사역에 힘이 되고 격려가 되었던 것이다.
또 다른 하나, 로제타 홀이 조선에 와서 한 사역을 통해 하나님이 그 영적 후손인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로제타 홀이 가장 무게를 두고 한 사역 중 하나가 여자 의사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당시 여자 의사가 정말 필요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여인들은 병이 들어도 남자 의사들에게 몸을 보일 수 없어 병원에 가지 않고 병을 키우다 그냥 죽어 갔기 때문에 로제타 홀은 이를 너무나 안타깝게 여겼고, 마침내 여의사를 양성하는 기관을 세웠던 것이다.
박관태 선교사님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바로 이 땅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의사가 되는 것임을 로제타 홀을 보며 깨달았다. 그렇다면 과연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의사는 어떤 의사일까? 그것은 소위 말하는 대학병원의 최고 실력을 갖춘 명의, 대가일까? 아니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의사는 육체적인 질병뿐 아니라 그 사람의 영혼까지도 돌보는 전인치유를 지향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 세상의 연약한 부분을 품을 수 있는 그런 의사다.
좌절, 재학이의 투병
박관태 선교사님에게는 영원한 벗, 재학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학생 시절부터 몽골 선교에 대한 마음을 품고 쓰임 받기 위해 각자 내과, 외과를 전공하기로 했던 사이였다. 학생 시절을 마치고 전공의로 수련을 받을 때쯤 박관태 선교사님은 흔히 하는 말로 세상에 눈을 떴다. 1년 차 때 예기치 않게 담당 환자가 죽는 일이 발생한 후, 주변의 선배나 동료들이 위로해 주기 위해 술자리를 만들었다. 선배들의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저마다 건네주는 술을 넙죽넙죽 받아 마시다 보면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괴로운 마음도 사라지곤 했다. 꼬인 혀로 횡설수설하며 새벽 5시까지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셔 댔다. 다음날 술이 덜 깬 상태로 회진 돌아야지, 일해야지,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고 또 술판이 벌어지고 그렇게 3일째 반복하다 보면 환자가 죽었던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된다. 2년 차가 되니 자신도 후배들에게 똑같이 하고 있었고 3년 차쯤엔 어느새 술집과 온갖 종류의 폭탄주를 두루 섭렵하고 술자리를 주도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레지던트 2년 차 때 절친인 재학이에게 악성 임파종이 발견됐다. 재학이의 병을 치료해 달라고 새벽마다 기도하면서도 박관태 선교사님의 삶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지금 열심히 기도해도 될까 말까인데 저녁마다 술판을 벌이고, 그것도 모자라 술 냄새까지 풍기면서 병실을 찾아가다니... 내가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그때의 좌절감과 패배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술 냄새를 풍기며 병실을 찾는 것이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하루에 한 번은 얼굴을 봐야겠기에 저녁마다 재학이를 찾아갔다.
- 재학아, 내가 이래 가지고 무슨 선교사로 나가겠니.
병실에서 재학이에게 늘 하던 말이었다. 그럴 때마다 재학이는 병상에 누웠으면서도 오히려 박관태 선교사님에게 위로를 건네고 격려해 주었다.
'내 몫까지 부탁한다.'
재학이의 상태는 악화되어 결국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이후에도 박관태 선교사님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재학이의 존재는 유혹을 뿌리치는 것에도, 선교 사역을 감당하는 것에도 큰 힘이 되었다.
마르다에서 마리아로
이 부분을 읽으면서,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난 후 느낀 점은 이 부분이 이 책을 관통하는 본문이라는 점이다.
'하나님, 몽골로 보내만 주십시오. 제가 대한민국 외과의사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해 보겠습니다. 아픈 사람들을 다 고쳐 주겠습니다. 그동안 전공의 생활 중에 술 먹고 엉망으로 살던 것 다 만회하겠습니다. 슈바이처처럼 좋은 의사가 될 것이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술하며 저의 모든 정열을 불태우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셨다. 책을 읽어도 말씀을 읽어도 기도를 해도 한결같이 외과의사이기를 포기하라고 말씀하셨다. 몽골에 가서 아무 일도 하지 말라시는데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 따지고 물었다.
'하나님, 제가 하려는 게 잘못이 아니지 않습니까. 복음 전하고 아픈 사람들 고쳐 주라고 저를 외과의사로 만들어 주신 것 아닌가요? 하나님, 지금 저 가지고 장난치시는 거예요? 제가 잘못 들은 거죠?'
보름 가까이 이 문제로 하나님과 씨름하던 어느 날 새벽 큐티 시간이었다. 누가복음 10장 38-42절의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로 박관태 선교사님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여행 중에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사는 마을에 들렀고, 마르다가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 준비로 바빴다.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동생 마리아가 홀로 바쁘게 준비하는 자신을 거들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마리아더러 자신을 도와주라고 말씀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정확히 박관태 선교사님에게 하시는 말씀이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1-42).
분주, 많은 일, 염려, 근심... 어느 것 하나 박관태 선교사님에게 해당되지 않는 단어가 없었다. 30년 동안 주님 안에 있었지만 단 한순간도 분주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염려와 근심을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 늘 많은 일로 분주하면서 사역을 위한 것이라고 위안 삼았고 오히려 바쁜 것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너무 바빠서 주님을 잊고 산 적도 많았다.
마르다는 분명히 선한 동기로 시작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 집에 방문했으니 해드리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원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음식 접대가 아니라 그의 전인격을 원하셨던 것이다. 박관태 선교사님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 인정받을 수 있는 것으로 주님을 섬기려 했다. 주님께 자신이 만든 방식의 사랑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이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는 안중에도 없이 말이다.
마리아의 위대함을 다시금 묵상해 본다. 마리아라고 주님께 음식을 차려드리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토록 사랑하는 주님께 뭐라도 해드리고 싶은 열망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내려놓고 주님 발아래 앉아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인 마리아의 위대한 순종에 오늘도 도전을 받는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2).
이후에 책에 기록되어 있는 다른 이야기들 또한 감동과 울림을 주며 큰 도전이 된다. 꼭 읽어보시길 바란다.
박관태 선교사님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면서 나의 부족함과 분주함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 나 역시도 이걸 하면 하나님이 더 좋아하시겠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열심히 하는 게 다 하나님을 위해 하는 거라며 합리화했지만 결국 되돌아보니 그 중심에는 하나님은 온 데 간데없고 내가 형상화 한 어떤 우상이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걸 깨닫자 나의 삶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인지하게 되었고 지금 내가 처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건 무엇일까 생각해 봤다.
대학병원에서, 흉부외과 중환자실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나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당장 다 그만두고 해외로 나가서 선교를 하라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배운 지식과 술기들을 통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고 그들을 돌보고 회복을 돕는 일을 원하시는 걸까? 아니면 좋은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힘이 되어주는 것을 원하시는 걸까?
위에서 서술한 모든 것들은 무척 열정적이고 필요한 것들이고 의미 있는 일들이지만 내가 묵상한 바로는 하나님께서는 그것보다 다른 걸 원하시는 것 같다. 거룩하게 살기. 그게 제일 중요하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이 땅에서 살아내고 거룩함을 유지할 때 비로소 타인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무수한 행위와 의지들이 자연스레 빛을 발하게 됨을 깨닫는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가장 중요하다.
몸이 너무 피곤해서? 밥도 못 먹고, 물도 못 마시고, 화장실도 못 가면서 일해서? 주변에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아서?
핑계만 늘어놓다가 매일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그 기회를 놓치고 후회가 쌓일 수 있다. 그러다가 어느새 정신 차려보니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날이 올 수도 있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그 모든 주파수를 하나님께 맞춰야만 지금 있는 이 곳에서 하나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다. 쉽지 않겠지만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나아가면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마지막에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