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polisopher
Aug 03. 2019
일본 사람은 없고 한국 사람은 있다
사진 = 로이터
1
일본은 전국 도처에 크고 작은 미술관이 잘 갖춰져 있는 것 같다. 아름답게 꾸민 넓은 잔디밭 위에 과거와 현재가 조화로운 건축물들이 서있다. 그곳을 찾은 이들은 자리를 깔고 소풍을 즐긴다. 벤치에 앉아 이어폰을 꽂고 책을 읽는다. 일본 사람들의 삶의 여유를 느낄 수 있다.
일본 큐슈 남단에 위치한 작은 도시의 미술관을 찾았다. 로비 한 바퀴 둘러본 뒤 위층에 있는 특별전시관에 갔다. 지역 출신 인상파 작가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 온통 붉은빛의 그림에 시선을 빼았기고 있었는데 한 노인이 내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가더니 자신의 작품이라고 했다. 덕지덕지 들러붙은 저 붉은 페인트는 어떤 의미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작가와 사진도 한 컷 할 겸 대화를 청했다.
그는 내가 일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살짝 당황해했다. 그리고는 추억에 젖은 애잔한 눈빛으로 자신이 태어난 곳은 거제도라고 했다. 그는 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북한과 서울로 오가며 어린 시절을 보낸 후 전쟁이 끝나자 돌아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또래의 한국 아이들이 모두 일본어를 쓰고 있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너무 안타까운 일이라고 했다.
식민지 한국에서 태어난 지배국의 소년이 무엇을 얼마나 고민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는 연신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고 있었다. 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잡고 웃어주었다. 작가는 한국의 문자가 원래부터 있었냐고 묻는다. 한글의 전통은 조선 초 세종대왕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 작가는 새로운 사실을 들었다는 듯 다소 의외의 표정을 하며 재차 물었다. 일본 문자에서 따 온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 한글은 한국의 고유의 문자입니다.'
2
원자폭탄이 떨어진 나가사키 평화공원에 이르자 어마어마한 인파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원폭 참상을 담고 있는 유일한 곳이어서인지 여러 나라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90퍼센트 넘게는 일본인으로 선생님 뒤를 쪼르르 쫓는 초등학생부터 까까머리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어린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전쟁을 겪은 듯 보이는 백발의 선생님 설명에 귀를 쫑긋하고 있었고 평화 탑 앞에서 기원 메시지를 읊고 사진도 찍고 있었다.
무척 인상적이었다.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며 역사왜곡에 앞장서고 있는 아베 정권과 달리 젊은이들은 평화의 소중함을 배우고 있었으니 미래의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가 그리 어둡지만은 않겠다 생각했다. 평화공원 경내는 원폭으로 희생된 외국인들의 위령비도 있었다. 볼 것도 없이 선조들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경내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중국인 위령비 크기를 보면서 가장 큰 고통을 당한 한국인의 '것'을 가늠했을 뿐이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한국인 위령비는 공원 밖 길거리 그것도 엘리베이터 옆에 작고 초라하게 모셔서 있었다. 위령비라고 하기도 민망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표지석으로 착각할 만큼 위치도 형태도 궁색해 보였다. 평화라는 문자로 도배하다시피 경내를 채우고 수많은 어린 학생들에게 전쟁의 참상을 설명하고 구호를 외치고 묵념을 하고 있는 일본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은 과연 평화공원의 담긴 의미를 알고 있기는 할까. 누구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것일까.
3
일본은 왜 그토록 무모하리만치 역사 지우기를 포기 않는가. 물론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지옥에서나 있을 법한 악당 짓이 창피하기도 했겠지. 그러지 않고서야 이토록 자기 암시ㆍ집단최면을 걸면서까지 감추려 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역사란 무엇인가를 쓴 영국의 E. H 카는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들의 지속적 상호작용의 과정이자,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과거를 잊고 싶은 그들에게 카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을 듯싶다. 에혀.. 일본 정부는 틀려먹었고 그나마 의식 있는 일본 사람들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는데 그들은 폐 끼치는 게 싫어 나서는 걸 꺼려한다니.. 쩝.. 파국 해결, 뜨거운 시민들, 한국 사람밖에 없다는 겐가.
참고
- E.H 카 관련 네이버
-文 대통령 "국민 힘 모아달라.. 도약의 기회"(19.8.2.m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