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olisopher Oct 04. 2019

배트맨을 만든 '조커'

그럼 조커는 누가 만들었는데?




조커는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한 번 터져버리면 한참을 웃어야만 하는 체질갖고 있는 아서 플렉, 병든 어머니를 간병하며 코미디언을 꿈꾸고 있는 그는 어릿광대 분장을 하고 거리에서 홍보 활동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간다.     


아서는 원대한 꿈을 가진 것도 누군가에게 절대적 관심을 받고 싶은 것도 아니다. 상식 안에서 최소한의 예의, 고통받는 시민에 대한 정부의 의무 정도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싶어 코미디언이 되고 싶은 소시민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억지 웃음을 지어보이는 아서, 저 눈물.. 어쩌면 웃음 뒤에 가려진 우리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 (사진=영화 조커, 네이버)


그는 건강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지만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한다. 어린아이들은 그를 조롱하고 두들겨 팬다. 회사에서는 쫓겨난다. 친절을 베풀고 애원을 해도 돌아오는 건 멸시와 냉대뿐이다.      


마침내, 그런 세상을 향해 저항을 시작한 아서, 자신을 무시하고 때리는 이들에게 억눌린 감정을 토해낸다. 공교롭게도 빈자들의 적인 금융 종사자를 죽이게 된다.    


그는 자신이 살기위해 우연히 살해했을 뿐이지만 가난과 고통이 일상인 사람들은 뜨겁게 환호한다. 거리는 불타고, 부자는 강탈당한다. 그 정점에 아서조커되어 서 있었다. 혁명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    


아서는 웃음이 터지면 쉽게 멈추지 않은 체질갖고 있다. 딸꾹질을 마음먹은 대로 멈출 수 없는 것처럼 그의 웃음도 그러하다. 그로 인해 겪는 무시와 경멸은 일상.    


우리는 너무 쉽게 극단의 프레임으로 나눈다. 쪼개는 기준은 자신이다. 나와 생각ㆍ행동이 다르면 비정상이 된다. 아서는 가난하고 그만의 특이성향이 있지만 왜 그가 눈총을 받고 특별하게 다루어져야 하는지 부당하다고 느낀다.     


웃음이 한 번 터지면 쉽게 멈추지 못하는 아서플랙(훗날 조커) 그는 그의 특이행동이 다른 이에게 오해받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이는 사려 깊은 사람이다. (사진=영화 '조커' 네이버)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이러한 프레임의 설정은 권력자들이 정해놓은 질서라고 했다. 정부 최고 권력자 외의 정보의 독점자들의 말이 곧 법이 되는 세상에서 정상과 비정상이 나뉘는 건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감옥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병원에서 주도권 가진 자들은 타인의 생각과 목숨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만큼 영향력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들의 질서는 곧 세상의 질서가 다.


그들을 조롱하고 싶어서일까. 마지막 장면에서 아서는 괴기스러운 눈빛을 고쳐 곧게 바라보더니 정신병 전문의에게 말한다. 나의 상태를 너는 ‘이해 못할 거다.’라고.     

   

조커의 가면    


사전에 따르면 조커는 웃기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흔히 과장된 분장을 한 피에로를 떠올릴 수 있으리라. 길거리에서, 모처럼 맡게 된 어린이 병동에서 아서는 립스틱을 귀에 걸릴 만큼 짙게 발라 입술을 만든 다음 과도한 율동으로 관객들에게 재미를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슬프다. 늘 자르겠다고 으름장 놓는 업주가 있고, 늙고 병든 어머니가 있다. 그리고 웃음을 참을 수 없는 특이 고 있다. 가장 낮고, 어둡고 슬플 수밖에 없는 그에게 피에로 연기는 잔인해 보인다. 하지만 코미디언의 꿈, 생계의 문제 앞에 선 그에게 피에로 분장은 숙명과도 같다.  


페르소나라는 개념을 유행시킨 분석심리학자 C.G 융은 가면은 사회생활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쾌활한 사람이 아니지만 남에게 욕먹지 않기 위해 신나는 척을 하고, 모차르트를 좋아하지 않지만 회사 매출을 위해서 고객 취향에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아서가 쓴 피에로는 융의 페르소나와 다르다. 그는 분장을 했지만 의도한 것은 아니다. 그저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이었을 뿐이다. 피에로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피에로가 되고 싶었다. 코미디를 통해 사람에게 재미를 주고 그 안에서 보람을 찾고 싶었다.     

 

선과 악은 하나의 모태    


앞서 묘사한 대로 아서는 단지 무시당하고 이유 없이 매 맞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과 사람들은 그를 경멸하고 때렸다. 그의 분노는 최소한의 자기 방어에 머문다.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폭행을 당하자 살기 위해 총을 쏘았다.    


그는 단지 공포와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사람을 죽였다. 지극히 사적 동기로 사람을 죽였는데 많은 이들에게 지지를 받는다. 세상에 죽어도 싼 인격은 없다. 하지만 ‘살해당함’이 누군가에게는 열광할 만큼, 고담 시민의 마음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고 했던가. 헐벗고 굶주린 이들의 히어로가 되어버린 아서, 아니 조커는 입술 사이로 흘린 를 손가락에 찍어 볼을 넘어 귀밑까지 덧칠한다. 립스틱이 아닌 피로써 웃는 모습을 그려낸다.     

 

또 다른 어둠의 영웅이 된 조커, 그는 립스틱이 아닌 자신의 피로 웃음을 덧칠한다. 핏빛 웃음은 한쪽 세상의 희망이다. (사진=네이버)


여기저기 불에 타는 자동차, 상점은 털리고 경찰이 공격당하는 고담시, 이윽고 어두운 골목을 어린 아들과 뛰어가는 부부. 이 부르주아의 상징을 쫓는 피에로 가면, 그는 부부를 쏘아 죽인다. 쓰러진 부모를 망연자실 지켜보는 아이, 브루스 웨인. 배트맨은 거기 서 있었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 떠밀리듯 만들어진 영웅, 조커 그리고 그가 불러들인 블랙 히어로 배트맨, 공교롭게도 들이 탄생한 장소는 같다. 어둡고 우울하며 극단적이다. 그 안에 선과 악의 경계는 없다. 단지 누군가영웅만 있을 뿐.     


경찰 In joker    


영화 '조커' 안에 경찰을 끌어들이기란 쉬우면서 어려운 문제다. 고담시에서 악은 경찰이 쫓아야 할 범죄꾼이 맞지만 그들이 악이 될 때까지 정부는 무엇을 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서다.     


상당수의 악은 사회가 만들어 낸 측면이 있다고 한다. 나쁜 놈들이 되도록 등 떠밀지 않았더라도 그들이 어둠과 결탁할 때까지 수수방관한 책임은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아서 아니면 브루스 웨인이었다. 행위를 떠돈과 권력의 있고 없음, 학벌의 높고 낮음, 인맥에 따라 나쁜 사람도 좋은 사람도 고 있었다.  


그렇다면 경찰관의 가면을 쓴 나와 당신은 조커일까? 배트맨일까?  


ㆍ대한민국 파출소 경관ㆍ


매거진의 이전글 궁예와 임꺽정이 머문 곳에서 번뇌를 씻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