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동방예의지국

by polisopher

“봉순경님이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 보세요. ”

“뭐를...”


과장은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솔직히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다. 사석에서 형님 동생 하자는 말이 잘못인가.

“내가 뭘 잘못했을까요?”

“정말 모르는 겁니까. 모르는 척하시는 겁니까.”

“잘 모르겠네요.”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내가 과장인데.. 말을 놓자고 하면”

“누가 직장에서 말 놓는대요? 사석에서 하자는 얘기지”

“참내”


“직장에서는 직급이 높아 존중한다고 쳐, 밖에서는 직급보다는 나이 경력 뭐 이렇게 가 줘도 좋잖아요.”

“......”


“김 경위한테 형님 형님 하길래... 나도 되는 줄 알았지. 그냥반 경찰대 아니지 않나요? 오라. 초록은 동색? 그러니까. 같은 경위급은 그 안에서 형 동생 가능해도. 순경은 격이 안 맞다? 그런 거?”

“그게 무슨...”

“엿 같네. 완전 신라시대네.”


과장이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가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뭔가 켕기는 게 있었던 모양이었다.


조카뻘 되는 과장이 하대해도 조아리고 극존대하는 사회가 나는 여전히 이상하다. '직장이니까'라는 논리가 언제부터 허락되었을까. 우리 민족처럼 나이 엄청 따지는 나라에서.


젖 뗀 아이부터 노인정의 어르신들에 이르기까지 부자든 가난하든 가방 끈이 짧든 길든 두 명만 모여도 따지는 게 나이 아닌가 해서.


그런데 도대체 왜들 그래? 계급이 높아지면 왜. 전투력이 막 상승해? 잘 알지도 못 하는 형님 순경들한테 말 까는 게 그렇게 좋아?


서장이면 퇴직 얼마 안 남은 할아버지 경위한테 반말해도 되는 거야? 승진했더니 사람의 탈이 벗겨져버리던?


왜 변태가 되는 거야. 너도 잘 모르겠지. 혼란스럽지. 근데 묘한 쾌감 때문에 오줌이 마렵지. 그지?


“형이라고 부르면 되잖아요.”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뛰쳐나간 과장이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형이라고 한다.


“내가 형 소리 못 들어 안달 난 사람같냐? 왜 그랬는지 말해줄게. 너도 솔직하게 말할래?”

“네...”


“너를 고약하게 봤던 점은 인간을 동등하게 보지 않았다는 거다. 나도 김 경위도 너 보다 나이는 많아. 나이로 치면 내가 서너 살 더 위지. 맞지?”

“맞아요.”


“그런데 넌 김 경위에게 형이라고 했어. 그러면서 나한테는 그냥 하대했어. 왜 그랬을까? 왜 그랬냐?”

“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형과 나 사이에는 벽이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게 뭔데”

“계급도 계급이지만 출신 간의 괴리였다고 봐요.”


“그게 무슨...”

“순경 출신들 사이에서 계장이 직원에게 호형하는 경우는 흔하잖아요.”


“그래서”

“어떤 동질감이 작동했다는 거죠. 그건 우리 출신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새파란 경위라도 순경 형님들한테 존대하기가 쉽지 않아. 잘은 모르겠어. 왠지 금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흥미롭네.. 계속해봐.”

“동질의식을 못 느낀다는 거겠죠.”


“그럼 김 경위는 왜 형이라고 했어.”

“말씀 하셨잖아요. 초록은 동색.”


“골품제네.”

“그렇죠. 터무니 없지만 굳이 비슷한 걸 찾는다면 요.”


“골라봐. 너는 뭐야.”

“저요? 최소한 6두품이라고는 생각 안 해요. 어찌 됐든 이 조직이 경찰대 출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잖아요. 청장도 벌써 둘씩이나 나왔고.”


“반면 순경 출신 청장은 한 명도 없지.”

“아니죠. 한 명 있잖아요. 그분.”


“그 냥반? 경사에서 경위 승진하면 되는데 굳이 간후보 시험을 다시 치른?”

아...


“그때는 간후보가 윗대가리들이었잖아. 출세하려면 순경 출신보다 간후보 타이틀이 낫지 않았겠어. 일종의 신분세탁이 필요했던 거지.”

“듣고 보니 일리가 있네요.”


“너 솔직해서 맘에 든다.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말해주라.”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너한테 순경은 뭐냐?”

“떼죠. 시끄러운 대중. 계몽이 필요한.”


“개새.. 진짜 솔직하네.”




계급이 깡패, 모래알 조직이라는 말, 이 말처럼 경찰을 압축적으로 묘사해주는 표현은 없다.


일제와 전쟁, 군부를 거치면서 폭력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계급은 깡패와 다르지 않았을 거야. 악습이 조직문화가 되어버린 거지.


아무튼 그런 시대에서 사람 대접 받을 수 있는 길은 공부ᆞ공부공부. 그것도 관료로 가는 공부. 그게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 그나마도 지금은 가진 놈들이 독식해버리는 바람 없는 이들에게 출세의 길은 막혔어.


경찰대학 같은 제도. 법률로 만들었어. 국민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던 시대에는 잘 길러진 관료집단이 필요했을 거야.


가난을 면해보고 싶든 정의를 실현하고 싶든 군부에 충성하고 싶었든 그들은 그렇게 똑똑한 깡패로 키워졌지. 30년이 지난 지금 봐봐. 어때.


지금은 시민의 힘으로 대통령을 끌어내릴 수 있는 시대가 되었어. 국민 통제용 관료집단이 필요 없게 된 거지. 참 똑똑해. 알아서들 제 길을 찾았어. 그저 권력이 되고 싶은 집단으로.


세련되고 똑실똑실한 모습으로 정교하게 관료를 형성하고 지배체제를 견고히 하고 있어. 누구도 알지 못해. 특히 현장은. 그저.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가리고 있을 뿐이야.


지성과 합리를 포기한 대입 시험의 달인들이 장악한 경찰에서 효율적이지 않은 효율성만 강조될 뿐 휴머니즘은 없어.


골 때리지 않냐? 사람의 자유를 지키고,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박애주의자들 안에 사람이 없다는 게.


같은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출신으로, 계급으로 쪼개 놓고는 현장의 품위를 밟고 있어. 그래서 막 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봐. 어차피. 계급이 왕이니까. 지들이 구축해 놓은 성 안에서.


그래서 현장에서는 나이라도 붙들고 있는 거 아닐까. 그거라도 지켜 젊은 관료집단 앞에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이런 현상. 자연스러운 거야? 명확히 이해돼? 나는 모르겠다.


근데 뭐가 제일 문제인지 알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아. 덮기에 급급할 뿐. 긍정 마인드라는 이름으로. 그것도 걔들이 만든 프레임인데...


바보들...


ㆍ대한민국 파출소 경관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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