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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lisopher Jul 09. 2020

죽음에 이르는 병



죽음에 이르는 병

감찰 조사 이후 발생한 경찰관의 죽음이 인과관계로 확인되지 않았지만 감찰조사와 죽음의 깊은 상관관계를 우리는 보아왔다. 경찰이 정의를 위해 존재한다면 경찰인 감찰 또한 정의를 위해 있는 것은 당연. 하지만 그 정의로움이 누군가의 죽음에 영향을 미쳤다면 그 실현 방식은 잘못이며 연이어 발생했다면 이제 그 정의는 악행이 된다.

19세기 덴마크의 사상가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일컬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그의 통찰력은 이후 사회과학적 방법론에 의하여 꾸준히 증명되고 있는데 불확실한 미래의 터널을 걷고 있는 현대인들은 스스로 임상 결과지처럼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이 21세기 키에르케고르들은 그 죽음 병을 스트레스와 우울증이라고 말하곤 한다.

죽음 병들의 원인은 복합적인데 특히 불만족의 상황이 계속되거나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즉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 극에 달하곤 한다. 그 상태에서는 합리적 이성은 전이가 일어나 사는 것보다 죽음을 택하는 것을 오히려 현명하다고 판단하게 된다.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힘으로 살라’ 는 말이 당사자에게 공허하게 들리는 건 그래서 일게다.
 
2018년 감찰개혁 대토론회 이후 감찰행정이 진일보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수든 고의든 그 일로 그들과 인연을 맺은 이들이 행위 책임을 넘어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게 되며 심지어 실행에 옮기고 있다. 그렇다면 감찰의 정의 실현이 죽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방증이 되는 셈인데 일부러 병원균을 퍼뜨리는 게 아니라면 그것의 번식을 방관하고 있다는 뜻일까.

감찰 '목적 달성ism'이 노리는 것

조직(원)보호라는 명분 아래에 끝도 없이 펼쳐지고 있는 버라이어티는 감찰의 목적 ‘달성ism’효과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넘어서지 말아야 할 선을 고무줄 놀이하듯 넘어선다. 인간의 마지막 보루인 인격권이 경찰에게 있나 싶어서다. 인권의 대한민국에서는 피의자 얼굴을 쉬 공개하지 않는다. 명예의 마지노선이라는 고민의 흔적일 터. 그러나 경찰은 배제된다.

징계 의결서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당사자는 만천하에 오픈된다. 물론 상세하게 까지않았다고 할 터이지만 저 정도의 행위만으로도 우리는 기대 이상의 무언가를 성실히 해낸다. 한 다리만 건너면 신상은 간단히 까발릴 수 있고, 성과금 마이너스의 원인자로 지목하여 맹폭하면 그만. 공공의 적이 된 이는 들리지 않는 소음 때문에 머리를 감싸 쥐고 땅에 박는다.

경찰의 폭력성과 meme

지난 2년간 경찰은 독립투사 김구 선생님을 초대 경찰청장으로 모셨고, 회복적 사법을 회복적 경찰활동으로 구체화하고, 법집행 과정에서 시민 존중을 기반으로 정의로운 경찰상을 추구해왔다. 바람직한 방향이다. 왜냐하면 그 저변에 인간 존중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인간미 넘치는 경찰청이 동료를 향해서는 그리 따뜻하지도 정의롭지도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경찰 안의 폭력성이 상하좌우 켜켜이 옭아매 서로에게 가해자가 되는데 주저함 없게 해주기 때문이다. 즉 계급 탑 아래 갇혀 있는 구성원의 심장과 뇌에 녹아든 공격성이 상호작용하며 대물림한다. 특이할 만 한 건 폭력의 톤이 전에는 노골적이었던 반면 이제는 미소를 띠고 있다는 것, 이렇듯 더욱 세련된 모습으로 둔갑한 폭력은 정의롭게까지 보여 반감없이 수용된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경찰 구성원이 폭력성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또한 일종의 밈 효과로 이해된다. 권위주의에서 출발한 계급 체계는 인간을 효율과 능률 아래 종속시키는 것으로 진화했고 마침내 조직 고유의 문화가 되었다. 만성적 자기비하는 물론 비인간적 대우, 부당한 인사 시스템 아래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직장협의회는 어디로 가야할까

여기저기서 직장협의회가 설립되어가고 있는 모습을 본다. 누구는 권력을 위해 누구는 명분을 위해 다툼도 벌이는 모양새다. 싸움이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태동 시기의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여하튼 누가 되든 선구자의 길을 가겠다는 이에게 일단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다만 가려는 길이 동료를 밟고 가는 길인지 동료들이 밟게 될 길인지 넓고 깊게 헤아려주었으면 한다.

직협은 지휘부와 협의를 통해 현장의 권익을 관철해 나가는데 있으므로 그 종착지는 그들의 보편적 행복에 두어야 마땅하다. 다른 말로 헌법적 가치 실현에 있다. 그렇다면 두루두루 만족하며 나아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건 계급없는 조직의 구상이다. 맥락없는 경쟁의 수렁 속에서, 행위 책임 이상의 죽음이 강요되는 현장에서 그들을 구해내야 하지 않을까.
 
-평ᆞ론ᆞ경ᆞ찰ᆞ대ᆞ파ᆞ경-
 
영감을 준 자료
-죽음에 이르는 병(키에르케고르)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
-감옥과 처벌(미셸 푸코)
-경찰청 현장활력소 게시글들
-대한민국 헌법
-NAVER
-음주사고 경찰 ‘극단적 선택’ 유족 “또 다른 원인 있다”(JTBC.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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