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금 떠올려보는 내 인생의 목표
어릴 적 읽었던 토머스 쿤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는 '패러다임'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사실 과학자나 공학자를 꿈꾸게 된 계기가 바로 이때부터였다. 이 단어의 무게를 처음 알게 되었고 꿈의 씨앗이 되었던 책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패러다임이라는 것은 단순한 이론이나 현상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문제라고 보는지, 어떤 데이터를 수집하는지, 어떤 실험 장치를 만드는지, 어떤 결과를 옳다고 인정하는지가 모두 포함된 사고의 틀이다. 여기서 '우리'라는 범주는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을 일컫는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듯 이 사고의 틀이 바뀐다는 건 단순한 변화가 아니다. 어렸을 적 우리는 전화를 받는다는 수신호가 엄지와 소지는 피고 나머지 손가락은 구부려 엄지는 귀에, 소지는 입에 가져다 대는 행위로 대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냥 스마트폰을 쥐는 듯한 손동작으로 귀에 가져다 대는 게 전화를 받는 수신호가 되었다. 전화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패러다임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책을 덮을 무렵 나는 결심했다. 공학자로서 나는 좋은 결과나 뭔가 엄청난 발명을 만드는 것에만 그치지 않겠다고. 그로 인해 우리가 '편의'라고 생각하는 범주 자체를 틀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즉, '문제를 정의하는 틀’ 자체를 고민하고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단순히 효율을 높이는 기계, 빠른 알고리즘, 더 큰 처리량 등의 결과만 추구하는 대신, 어떤 문제를 더 중요한 문제로 바라볼지, 어떤 가정을 버릴지, 어떤 방법론을 전환할지. 그리고 그것들이 바꿔줄 미래가 어떤 것일지 고민할 줄 알고 인식을 뒤틀어버리는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다.
최근에 패러다임 변화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사례가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현재 인류의 사고방식을 바꾸고 있다. 특히 한국사람들이 정보 탐색용으로 구글링을 대체하는 용도로 많이 쓰고 있지만, 사실 다른 나라에서는 이를 포함해 방식의 변화를 많이 이루어내고 있다. 공학, 특히 소프트웨어 공학 분야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논문도 있다. “Generative AI and Empirical Software Engineering: A Paradigm Shift”는 이 변화를 분석하고 있는데,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전통적인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의 방법론, 연구 대상, 도구, 개발자의 역할 등이 새롭게 재정의되고 있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물론 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는 아니지만, 무언가 많이 바뀌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논문에서 일부 내용을 발췌하면 아래와 같다.
과거엔 소프트웨어 공학 연구에서는 정량적(Q), 정성적(Qualitative), 혼합적(mixed-method) 방법이 중심이었다. 연구 질문, 데이터 수집, 실험 설계 등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고, 개발자와 사용자의 역할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그런데 생성형 AI의 도입으로, 코드 생성, 코드 수정, 코드 리뷰, 테스트 자동화 등이 AI 도구와 협업하게 되었고, 더 이상 ‘사람 vs 도구’ 구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사람, 사용자, AI agent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고, 어떤 기준에서 ‘책임’을 물을 것인가, ‘품질’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등이 새롭게 논의되고 있다. 또한 AI가 생성하는 코드나 아키텍처가 실무에 도입됨에 따라, 전통적인 개발 프로세스 (요구사항 분석 → 설계 → 구현 → 검증)의 가정을 재고해야 할 필요가 커졌다. 설계 단계에서 사람이 명확하게 구조를 잡지 않더라도, AI가 탐색적 설계(exploratory design)를 할 수 있게 됐고, AI의 제안을 사람 엔지니어가 평가하거나 조정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이 변화는 공학에서의 ‘정확한 예측’과 ‘완전한 통제’라는 전통적 패러다임을 흔든다.
이 패러다임 개념과 최근 변화 예시들을 생각하며, 내가 앞으로 공학자로서 걸어야 할 길을 정해보려고 한다.
1. 틈새를 찾아 질문하고 늘려보자.
일반 과학이나 상식의 틀 안에서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을 무시하지 말자. AI가 생성한 코드의 품질 문제, 예측 불가능한 부작용, 책임 소재의 혼란 같은 것들은 틈새다. 이 틈새들을 관찰하고 질문하고, 기존 패러다임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
2. 기초 연구에도 기울일 용기를 가지자.
단순히 상업적 성공이나 단기 프로젝트 완수가 아니라, 설계 원칙, 인공 지능의 윤리, 시스템의 안정성, 예측 가능성 등에 대한 근본적인 연구를 병행해야 한다. 실패를 감수할 수 있는 실험적 시도, 모호한 결과라도 기록하고 분석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사실 이전 글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는 용기일 것이다.
3. 융합적 사고와 역할 경계를 허무는 연습
사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내가 잘한다고 생각하는 분야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점점 더 학문이나 산업 등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쪽으로 세상은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여러 분야의 지식과 관점을 익히고, 서로 다른 역할 간의 다리가 될 수 있는 역량을 길러 잡학다식함을 보유하되 수많은 도구들로 이를 확장하려고 한다.
4. 윤리성과 사회적 책임을 고려한 기술 개발
패러다임 전환은 단순히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도 포함한다. 기술이 어떤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등을 고민해야 한다.
5. 지속적으로 학습하고 적응하라
애초에 직업 자체가 새롭게 배우는 것을 포함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면 과거의 지식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새로운 연구 논문, 학제 간 워크숍, 동료 연구자들 간의 토론, 실패 사례와 비판적 사고 등에 스스로 노출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패러다임이 바뀐다는 말은, '보편적인 생각' 또는 '공동체가 공유하는 문제 제기 방식과 해결 방식”이 바뀐다는 뜻이다. 그 개념이 내 안에 씨앗이 되었기에 문제를 재정의하고, 틀을 바꾸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최근 세상의 여러 변화를 보며 지금이 패러다임 변화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시점임을 느낀다. 내가 그 변화의 주축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앞서 나가는 사람은 될 수 있지 않을까. 변화의 중심에 선 내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