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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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2학년 때,
좋아하던 남자아이에게서 발렌타인 사탕을 받았다.
분홍색 상자에 담긴 사탕은 그 나이의 나에게도 유난히 예뻤다.
괜히 가방 속에서 몇 번이나 꺼내 보고,
다시 조심스럽게 넣어 집으로 가져왔다.
집에 오자 세 살이던 동생이 그 상자를 보고 달라고 떼를 썼다.
아빠는 나를 보며 말했다.
“똑같은 거 사줄 테니까 동생한테 줘.”
나는 그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그런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던 순간들을
이미 몸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탕이 아까웠다기보다,
이번에도 그냥 없어질 것 같았다.
아빠가 다시 물었다.
“아빠 못 믿어?”
나는 잠깐 망설였다.
이 말을 해도 되는지 고민했다.
그래도 그 정도의 솔직함은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응, 못 믿어.”
그 한마디가 모든 것을 바꿨다.
결국 나는 사탕 상자를 동생에게 넘겼다.
동생은 잠시 가지고 놀다가 곧 흥미를 잃었다.
사탕은 바닥에 놓인 채로 잊혔지만,
아버지는 잊지 않았다.
그날부터
아빠가 퇴근할 때마다,
나는 아빠 방으로 불려 갔다.
이틀, 사흘.
집은 더 이상 쉬는 곳이 아니라
숨이 막히는 공간이 되었다.
그 방에서 나는
울 수도, 반박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너는 틀렸어.”
그 말이 여러 형태로, 여러 톤으로
계속 나를 향해 쏟아졌다.
나는 겁이 나서 얼어붙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를 숙이고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 계속 후회했다.
그때 그 말을 하지 말 걸.
못 믿는다고 말하지 말 걸.
그 며칠 동안
나는 한 가지를 배웠다.
이 집에서는
솔직해지면 더 아파진다는 것.
초등학교 6학년 때,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아이가 있었다.
갑자기 다른 아이의 바지를 내리거나,
나를 향해 때릴 듯이 손을 휘두르기도 했다.
나는 그 아이가 무서웠다.
그래서 집에 와서
그런 애가 있다고 말했다.
나는 위로를 바란 게 아니라
그냥 들어주길 바랐다.
그런데 아빠는 화를 내며 말했다.
“확 그냥 의자를 집어던져버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두려움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나는 생각했다.
아, 내 고민은 고민이 아니구나.
이 집에서는
어린애의 불안 따위는
성가신 소리일 뿐이구나.
또 한번 후회했다.
아파트 우편함 앞에서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았다.
나는 그 뒷모습이 아빠라는 걸 알아봤다.
그런데도 그쪽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무서웠다기보다는
어색했고, 불편했고,
아는 척하는 일이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 자리를 피하듯 집으로 먼저 올라왔다.
잠시 뒤, 집에 들어온 아빠에게
엄마가 말했다.
“방금 00이 들어왔는데, 못 봤어?”
아빠는 곧바로 나를 불렀다.
“너, 아빠 못 봤니?”
나는 또 솔직해졌다.
“봤어요.”
그 말로 충분했다.
그날 이후
아빠가 퇴근할 때마다,
나흘의 밤 동안
나는 아빠 방으로 불려 들어갔다.
그 방은 나를 가두는 공간이 되었다.
화를 내기보다
아이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그때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궁금해했다면 어땠을까.
만약 누군가 이렇게 말해줬다면
모든 것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괜찮아.
너 마음이 뭐였는지 궁금해.”
하지만 대신 나는
“너는 틀렸다”는 말을
여러 날에 걸쳐 들어야 했다.
그 이후로 나는
솔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나는
아버지가 진학하길 원했던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친구들은 좋았지만,
학교의 분위기는 일반고와 많이 달랐다.
몇몇 선생님들은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생들에게
수업 시간에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학교가 마음에 안 들면 자퇴해도 된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왜 저런 말을 쉽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는 내가
곧 그 말의 대상이 될 줄 몰랐으니까.
집이 멀어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그건 나에게 꽤 가혹한 일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고,
샤워실에 선배가 있으면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 나와야 했다.
하루는 너무 시간이 급해서
선배가 있는데도 머리를 감았는데
바로 불려가서 훈계를 들었다.
지금 같았으면
방법을 찾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때의 나는
버티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다.
집에 가면
나는 학교가 얼마나 힘든지 이야기했다.
위로를 기대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늘 같았다.
“때려쳐.”
그러면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자퇴하라고 하고,
집에서도 때려치라니.
내주변의 모든 어른들이 자퇴를 말하고있었고
나는 정말
자퇴를 할 운명이었던건지도 모른다.
그러다 어느 날,
또 “때려치라”는 말을 듣고
나는 이상하게도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만둘게.”
놀랍게도
아버지는 그 말을 막지 않았다.
나는 검정고시를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나를 믿지 않았다.
내가 끝내 중졸로 남을 거라고 말했다.
돌이켜 보면
우리 가족의 가장 큰 키워드는
불신이었다.
결국 나는
1년을 꿇고 일반고에 다시 입학했다.
그 시간은 나에게
벌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아버지 때문에
내 인생이 한 해 늦어졌다고 생각했다.
그 억울한 감정은
내가 대학에 갈 때까지
열등감이 되어 남았다.
입학한 첫해는 쉽지 않았다.
나는 1년 내내 겉돌았다.
담임 선생님은 엄격했고
나를 “시니컬하다”고 말했다.
왠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과 함께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이었다.
끼익—
앞차와 부딪칠 뻔하며 차가 급정거했다.
안도할 틈도 없이,
쾅—
뒤차가 우리 차를 들이받았다.
그 충격으로 우리차는 밀려나 앞차와 추돌했다.
연쇄적으로 차들이 부딪히며
다섯 대가 엮인 사고가 되었다.
우리 차는 네 번째였다.
다행히 모두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발등뼈가 부러져 수술을 받고
깁스를 한 채 학교에 다녀야 했다.
고1 때 반장 선거에 나가 반장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을까 싶지만,
그건 아마
이 학교에서 잘 지내보고 싶다는
나름의 시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교통사고를 당했다.
나는 친구들을 돕는 반장이 아니라,
친구들의 도움이 절실한 아이가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더 작아졌고,
그게 내가 겉돌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던 것 같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오래되어
승강기도 없었고
계단과 언덕이 많았다.
하지만 가장 서러웠던 건
급식 시간이었다.
내 식판을 들어줄 친구가
내 반에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나는
다른 반 아이의 도움을 받아
매일 급식을 먹었다.
지금 돌아보면,
부모와 담임을 포함해
그때 나를 따뜻하게 붙들어 준 어른은 없었다.
나는 조용했고 말을 아꼈다.
하지만 그건 성격이 아니라
이미 여러 번 좌절당한 아이의 방식이었다.
그래서 그 시간들은
지금도 서글프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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