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솔직하지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때의 방식

by 파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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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색상자


초등학교 2학년 때,

좋아하던 남자아이에게서 발렌타인 사탕을 받았다.

분홍색 상자에 담긴 사탕은 그 나이의 나에게도 유난히 예뻤다.

괜히 가방 속에서 몇 번이나 꺼내 보고,

다시 조심스럽게 넣어 집으로 가져왔다.


집에 오자 세 살이던 동생이 그 상자를 보고 달라고 떼를 썼다.

아빠는 나를 보며 말했다.

“똑같은 거 사줄 테니까 동생한테 줘.”


나는 그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그런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던 순간들을

이미 몸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탕이 아까웠다기보다,

이번에도 그냥 없어질 것 같았다.


아빠가 다시 물었다.

“아빠 못 믿어?”


나는 잠깐 망설였다.

이 말을 해도 되는지 고민했다.

그래도 그 정도의 솔직함은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응, 못 믿어.”


그 한마디가 모든 것을 바꿨다.


결국 나는 사탕 상자를 동생에게 넘겼다.

동생은 잠시 가지고 놀다가 곧 흥미를 잃었다.

사탕은 바닥에 놓인 채로 잊혔지만,

아버지는 잊지 않았다.


그날부터

아빠가 퇴근할 때마다,

나는 아빠 방으로 불려 갔다.

이틀, 사흘.

집은 더 이상 쉬는 곳이 아니라

숨이 막히는 공간이 되었다.


그 방에서 나는

울 수도, 반박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너는 틀렸어.”

그 말이 여러 형태로, 여러 톤으로

계속 나를 향해 쏟아졌다.


나는 겁이 나서 얼어붙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를 숙이고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 계속 후회했다.


그때 그 말을 하지 말 걸.

못 믿는다고 말하지 말 걸.


그 며칠 동안

나는 한 가지를 배웠다.


이 집에서는

솔직해지면 더 아파진다는 것.



의자를 집어 던져버려



초등학교 6학년 때,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아이가 있었다.

갑자기 다른 아이의 바지를 내리거나,

나를 향해 때릴 듯이 손을 휘두르기도 했다.

나는 그 아이가 무서웠다.

그래서 집에 와서

그런 애가 있다고 말했다.


나는 위로를 바란 게 아니라

그냥 들어주길 바랐다.


그런데 아빠는 화를 내며 말했다.

“확 그냥 의자를 집어던져버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두려움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나는 생각했다.

아, 내 고민은 고민이 아니구나.

이 집에서는

어린애의 불안 따위는

성가신 소리일 뿐이구나.

또 한번 후회했다.



우편함 앞 뒷모습



아파트 우편함 앞에서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았다.

나는 그 뒷모습이 아빠라는 걸 알아봤다.

그런데도 그쪽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무서웠다기보다는

어색했고, 불편했고,

아는 척하는 일이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 자리를 피하듯 집으로 먼저 올라왔다.


잠시 뒤, 집에 들어온 아빠에게

엄마가 말했다.

“방금 00이 들어왔는데, 못 봤어?”


아빠는 곧바로 나를 불렀다.

“너, 아빠 못 봤니?”


나는 또 솔직해졌다.

“봤어요.”


그 말로 충분했다.


그날 이후

아빠가 퇴근할 때마다,

나흘의 밤 동안

나는 아빠 방으로 불려 들어갔다.

그 방은 나를 가두는 공간이 되었다.


화를 내기보다

아이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그때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궁금해했다면 어땠을까.


만약 누군가 이렇게 말해줬다면

모든 것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괜찮아.

너 마음이 뭐였는지 궁금해.”


하지만 대신 나는

“너는 틀렸다”는 말을

여러 날에 걸쳐 들어야 했다.


그 이후로 나는

솔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때려쳐



결국 나는

아버지가 진학하길 원했던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친구들은 좋았지만,

학교의 분위기는 일반고와 많이 달랐다.


몇몇 선생님들은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생들에게

수업 시간에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학교가 마음에 안 들면 자퇴해도 된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왜 저런 말을 쉽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는 내가

곧 그 말의 대상이 될 줄 몰랐으니까.


집이 멀어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그건 나에게 꽤 가혹한 일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고,

샤워실에 선배가 있으면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 나와야 했다.

하루는 너무 시간이 급해서

선배가 있는데도 머리를 감았는데

바로 불려가서 훈계를 들었다.


지금 같았으면

방법을 찾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때의 나는

버티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다.


집에 가면

나는 학교가 얼마나 힘든지 이야기했다.

위로를 기대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늘 같았다.

“때려쳐.”


그러면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자퇴하라고 하고,

집에서도 때려치라니.

내주변의 모든 어른들이 자퇴를 말하고있었고

나는 정말

자퇴를 할 운명이었던건지도 모른다.


그러다 어느 날,

또 “때려치라”는 말을 듣고

나는 이상하게도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만둘게.”


놀랍게도

아버지는 그 말을 막지 않았다.


나는 검정고시를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나를 믿지 않았다.

내가 끝내 중졸로 남을 거라고 말했다.


돌이켜 보면

우리 가족의 가장 큰 키워드는

불신이었다.


결국 나는

1년을 꿇고 일반고에 다시 입학했다.

그 시간은 나에게

벌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아버지 때문에

내 인생이 한 해 늦어졌다고 생각했다.

그 억울한 감정은

내가 대학에 갈 때까지

열등감이 되어 남았다.




도움이 필요한 반장



입학한 첫해는 쉽지 않았다.

나는 1년 내내 겉돌았다.

담임 선생님은 엄격했고

나를 “시니컬하다”고 말했다.

왠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과 함께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이었다.


끼익—

앞차와 부딪칠 뻔하며 차가 급정거했다.

안도할 틈도 없이,

쾅—

뒤차가 우리 차를 들이받았다.

그 충격으로 우리차는 밀려나 앞차와 추돌했다.


연쇄적으로 차들이 부딪히며

다섯 대가 엮인 사고가 되었다.

우리 차는 네 번째였다.


다행히 모두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발등뼈가 부러져 수술을 받고

깁스를 한 채 학교에 다녀야 했다.


고1 때 반장 선거에 나가 반장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을까 싶지만,

그건 아마

이 학교에서 잘 지내보고 싶다는

나름의 시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교통사고를 당했다.

나는 친구들을 돕는 반장이 아니라,

친구들의 도움이 절실한 아이가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더 작아졌고,

그게 내가 겉돌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던 것 같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오래되어

승강기도 없었고

계단과 언덕이 많았다.


하지만 가장 서러웠던 건

급식 시간이었다.

내 식판을 들어줄 친구가

내 반에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나는

다른 반 아이의 도움을 받아

매일 급식을 먹었다.


지금 돌아보면,

부모와 담임을 포함해

그때 나를 따뜻하게 붙들어 준 어른은 없었다.


나는 조용했고 말을 아꼈다.

하지만 그건 성격이 아니라

이미 여러 번 좌절당한 아이의 방식이었다.


그래서 그 시간들은

지금도 서글프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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