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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기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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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주 Mar 17. 2017

0& 회사와의 이별

매 순간에 존재하는 분기점에서 선택은 오로지 나의 몫이다



독일 이야기를 시작하며, <아인강(Eingang)>은 독일어로 '입구'이다.


시작하며


“왜 독일이야?”

서른 살에 나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독일로 향했다. 태어나서 생전 발 디뎌본적도 없는 곳이다. 대학교에서 교양으로 독일어를 수강했지만 잘생긴 남성에게 다가가서 유용하게 사용할 “시간 있으세요?” 정도의 서바이벌 회화가 내가 기억하는 독일에대한 전부였다. 그렇다고 독일에서 적절한 일자리에 스카우트 제의가 온 것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나의 선택은 ‘독일’이다. 대한민국에서 나이 서른에, 그것도 결혼도안 한 여자가, 얼씨구? 버젓이 다니던 직장도 때려 치우고새로운 삶을 찾아 보겠다는 말을 내뱉었다.


어느 해 여름, 회사에서의 나의 시간은 어김없이 신규 사업과 해외 레스토랑 운영의 지원, 그리고 영업 실적 등의 관리 업무로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노는데 월급 꼬박꼬박 준다면 그게 회사겠는가. 일요일에도 주중에돌아가던 일하는 시계는 똑같이 흘러갔다. 멈추지 않았다. 내 방 침대에서, 집들이 하는 친구네 집에서, 지인들과 일상의 수다를 나누기 위해 만난 카페에서, 술 한잔 걸칠 포장마차에서도 휴대폰과 노트북을 통해 나의 회사 업무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내 나이 서른 살의 절반을 흘려 보내고 있었다.


<모치즈키 도시타카(Motizuki Doshitaka,일본작가)>의 ‘내 인생의 보물지도’라는 책을 접한 대학교 4학년에, 남은 인생의 목표를 세운 적이 있다. ‘대통령이 될 거야’라는 막연함 보다 육하원칙에 근거하여 조목조목 따져가며 효험이 있을지 때가 되어 봐야 알 나만의 꿈의 주문을 그려 나갔다.


오랜만에 화장대 서랍을 정리하다 발견한나의 보물지도에는 ‘…… 서른 살에는 사업을 시작하여……’착륙시점이 가까워 올 때 비행기가 땅으로 내려 꽂는 듯한 느낌을 몸으로 체감할 때처럼 뱃속에서 싸하게 무언가가 느껴졌다. ‘내 나이 스물 다섯에는, 내 나이 서른에는, 내 나이 마흔에는……’속이 매스꺼웠다. 그 때의 나는 어떤 사업을하고 싶었던 걸까. 그 때의 나는 누구였고 지금의 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걸까. 명함이 곧 신분증이 되는 멀쩡한 회사에 다니며 월급 꼬박 받아 배를 채우고 멋을 부리는데 충분한 여유를 부리는지금에 나는 그때의 내가 바라던 모습이 맞나. 화장대 앞 거울을 쳐다봤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얼굴에 웃음기는 하나도 없고 무언가에 쫓기듯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조차 없다. 불현듯 떠올랐다.


‘나 지금 행복한가?’



우중충한 단벌 외투로 겨울을 보내고 독일에도 봄이 찾아왔다. @프랑크푸르트

1.   회사와의이별


그렇게 나는 미련 없이 회사를 나왔다.

남녀 사이에도 이별 뒤에 미련이 남아, 질척하게 상대방에게 매달리고 찾아가고 하다못해 소름 돋게 온갖 SNS를 뒤져가며 스토커에 가까운 수준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종종 있다. 일도 마찬가지이다.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라 ‘대기업’에 입사해서 부모님의 아는 사람들, 학교 선후배, 지인들에게 좋아 보이는 게 우선이었다. 4학년이 되어 남과 다르지 않은 직장 생활을 상상하며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돌아 온건 불합격 메일만 잔뜩. 이력서를 백 통 넘게 썼다는 건 요즘 같은 때에 결코 별나지 않다. 나역시 수백 곳에 입사 지원을 했지만 면접을 볼 수 있었던 기회는 지원한 회사의 1할 정도였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눈이 높아서 취업이 어려운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대부분은 나와 친분이 있으나 나와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나는 단지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 뿐이다. 내가 영혼이라는 것을 걸고 최선을 다 해보고 싶은 일을 명확하게 정해두지 않았던 게 내가서둘러 일을 시작할 수 없었다는 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학을 다닐 때까지도 나는 꿈이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만약 내가 청소년 기에 꿈을 가졌다면, 누구앞에서라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인생의 목표가 있었다면 나는 수능 점수에 맞추어 학교와 전공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쉽게도 그때 역시 꿈이라는 게 막연했기에 나는 지금 생각해도 의외의 공부를4년간 이어갔다.


학교를 졸업하고 1년 반 만에 취업이 되었다. 그 동안 은행에서 인턴 생활을 하면서 어디에 쓰일지 모르는 영어 공부를 했다. 회화 시험이라고 하나 서점에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어학 교재 코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몇 권을 외웠다. 암기력이 부족한 내게 외우기식 영어 시험의 점수를 입사의 기준으로 삼는 우리나라의 취업활동은 쥐약이었다. 내 점수가 오르면 남의 점수는 더 많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름의 춥고 건조했던 시기를 지나 직장인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내게 좋은 일터와 나의 그럴싸 해 보이는 생활을 영위하게 해줄 경제적 능력을 주었던 회사와 연애라는 것을 시작한다. 그리고 몇 년 간을 나의 시간과 건강, 정신적인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고 미련이라고는 한 가닥도 남기지 않은 채. 


떠난다.




2012년부터 불 난듯 드나 들었던 인천공항. 바퀴가 닳아 지금은 못쓰게 된 여행 가방이 눈에 띈다.


미련이 남은 쪽은 내가 아니다. 

입사하면서 작성했던 근로계약서를 찾아 최소 1개월 전에 퇴사 의사를 밝혀야 한다는 내용을 발견했다. 나는 출근하자마자 조용히 팀장님께 면담을 신청하고 “저 그만두겠습니다.”라고 입을 떼었다. 누구처럼 항상 사표를 가슴팍에 품고 다닌다든지, “아 이놈의 회사 당장 때려 쳐야지”라는 입버릇을 달고 산다든지 하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 미리 알아챌 수 있었겠나. 까불대기만 하던 평상시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내 비장한 표정과 서리 내리듯 싸늘하게 굳어버린 말 한마디에 팀장님, 곧이어 이 사실을 알게 된 부장님, 나중에는 사업부의 상무님까지도 어이없는 표정이셨다.


나는 냄비 속을 뛰쳐나간 개구리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팀장님은 내가 뭐라고 나의 장밋빛 미래와 회사 생활의 즐거움을 항시 열거하며 나와 회사의 이별을 받아들이시지 못하신 눈치를 보이셨다. ‘다 한때다’ ‘회사 밖은 춥다’ 등의 이야기로 ‘애정이 없어도 정으로 살아라’라는 투의 이야기를 내게 계속뱉어내신다. 그리고는 그런 이야기를 내가 귓등으로도 들을 생각이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눈치채시고는 비장한한 수를 던져 보이신다. 공교롭게도 그 팀장님의 한 수는 나에게는 ‘하루라도 회사와 빨리 이별해야겠구나’라는생각을 굳히는 촌철이 되어버린다.


“냄비에 개구리가 물의 온도를 서서히 올리면 서서히 죽어. 그렇다고 물이 뜨거워지기 전에 냄비 밖으로 나간다면 어떻게 될까. 냄비 밖은 또 다른 세상이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나가자마자 지나가는 차에 치여 바로 죽을 수 있다는 거지. 바로죽을 바에야 서서히 죽는 게 낫지 않겠어?”


생각을 버리기 위해 강을 따라 걷다 보면 더 큰 생각을 얻게 된다. @마인강, 프랑크푸르트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는 분명 틀린 말이 아니다. 커리어의 단절은 미혼의 여자가 새로 직장을 구하는데 분명 빨간 불이 켜질 테다. 그리고 고작 삼 년차의 새파랗게 어린 친구가 하던 일들은 몇 달, 어쩌면 며칠 사이에 또 다른 누군가로 인해 나라는 사람의 빈자리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처리될 테다. 시리도록 현실적이지만 당연하다. 언제라도 누군가에 의해 대체될 수 있는 하나의 부품이었던 게 나의 현실이었고, 매 순간의 선택은 분명 나라는 인생을 항해하는 나의 몫이다. 나는서서히 냄비 속에서 죽어가는 개구리와 당장 차에 치여 생을 마감하더라도 냄비 밖 세상을 보는 개구리 중에 후자를 택한다. 고민할 가치조차 없다. 그리고 정확히 1개월 반 만에 질척거렸던 나의 사직서가 승인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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