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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기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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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주 Mar 26. 2017

첫 직장, 첫 도시, 첫 숙소




 처음으로 일하게 된 곳은 나를 포함해서 직원이 세 명뿐인 작은 물류업체였다. 내가 프랑크푸르트라는 도시를 나의 첫 독일 생활을 꾸려나가는 공간으로 결심한 이유이기도 했고, 앞서 내가 회사를 그만둔 이유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외식기업에서신입사원으로 일을 시작하고 몇 년이 흘렀더니 다른 산업으로의 이직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회사에 근무하는 동안에도 막상 원하는 산업 분야에 여러 번 이력서를 들이 밀었지만 동종 업계의 경력이 없기에 경력직으로 입사하지만 경력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아이러니한 대답들이 면접에서 돌아왔다.


당신은 경력직이니 우리는 당신의 경력을 살려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요구하겠소.
허나 다른 업계에서온 당신에게 우리는 경력을 인정하는 대우는 해줄 수 없으니
신입의 대우를 해주겠소.




광화문에 있는 해머 맨이 프랑크푸르트 메세(Messe)앞에도 자리잡고 있다.



같은 직무의 일이라도 산업이 달라지면 경력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깎여 닳아 없어질 정도이다. 그 동안 해온 일과 대단하지 않아도내가 가진 역량을 인정해 주는 회사에서 일하려면 또 다시 꿈이 아닌 현실을 쫓아야 했기에 스스로에게 강한 선택의 의지가 필요했다. 사람은 누구나 이상과 일상의 가운데에 서있기 마련이고, 나에게는 무역이라는 일이 이상이고 일상의 현실은 서비스 기업에서의 근무였다. 


막연하게 한국의 우수한 재화를 해외에 알리면서 세상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가히 기업 CEO들이나 언급할 만한 목표를 대학시절 브라질에 머물면서 세운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심하다 싶을 정도로 그 때의 나는 내 인생에 꽤나 커다란 뜬구름을 잡아 왔던 것 같다.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등을 여행하면서 남미에서 목격한 한국 대기업들의 커다라나 전광판 광고와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었던 가전제품들은 내게 에스전자에서 중남미 시장을 무대로 백색 가전을 판매하는 부서에 일하고 싶다는 꿈을 갖게 했다. 내가 한국에서 회사 생활을 시작하기 직전까지의 꿈이자 로망이었지만 여러 번의 고비를 거쳐 꿈은 바뀌는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었다. 그리고 내가 아닌, 나의 친애하는 대학 후배와 동기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고 지금까지도 열심히 일한 만큼의 대우를 받으며 일하고 있다. 한때는대동강 물을 팔았던 김선달처럼 하늘을 팔고 싶기도 했다. 교환학생으로 브라질에 머무르며 우루과이로 여행을 떠났던 때에 만난, 남미의 낙원인 푼타델에스테(Punta del Este)에서 지금 내가 눈으로 가슴으로, 머리로 기억한 하늘을 팔겠다고 다짐했었다.



석양이 지는 마인강변


왜 프랑크푸르트야?

어차피 따뜻하게 배를 채워주던 직장을 떠나 다른 일을 시작 하려면 새로운 출발점이 필요했고, 나는 그게 구태여 스물 몇 해를 살아온 대한민국 땅이 아니어도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가진 것들이 먼지처럼 흩어져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상태가 된다면 나는 그 새로움 속에서 더욱 열정적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생각이 들었다. 언어도 모르는, 그러나 앞으로의 진로와 인생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어딘가를 찾았고 내게는 그게 독일이었다. 


독일 최대의 상업도시이자 전세계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꼽히는 규모의 국제공항을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무역이 발달한 프랑크푸르트는 내가 두 다리를 땅에 딛고 숨만 쉬어도 배울 수 있는 게 많겠다는 막연함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프랑크푸르트는 유독 영어가 자국어만큼 통용된다는 얘기까지 듣고 나니 외국인인 내가 살아가기에 어려움이 적을 것 같았다. 수많은 물자가머물고 이동하고, 무역과 유통, 물류 전반을 생활에서 익힐수 있지 않을까? 유럽의 어디든 쉽게 떠날 수 있는 곳에서 독일이 아닌 유럽을 배워갈 수 있지 않을까?이런 상상만으로 온몸이 찌릿해왔다. 그렇게 나는 낯선 땅에 이끌려왔다.



나보다 며칠 앞질러 일을 시작했다는 인턴 직원과도 금새 사이가 가까워졌다. 해외를 나가려는 사람들에게 숙소를 구하는 게 항시 비자 문제 다음으로 수면위로 떠있는 걱정거리일지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근무하는 곳의 사장님께서 한 달 정도 머무를 수 있는 플랏(flat)을 빌려 놨으니 그 곳에서 지내며 편하게 제대로 된 집을 알아볼 기회를 주셨다. 인턴 직원으로 만난 홍차공주(독일에 와서 나에게 홍차의 맛을 알게 해준 홍차 전문가)와 나는 플랏메이트가 되었다.


홍차공주는 나보다 나이는 한참이나 어렸지만 학부에서 부전공으로 독일어를 공부했고, 이미 작년까지 근처 도시 <쾰른(Koeln)>에서 어학연수를 했던 소중한 경험을 지녔다. 돌이켜 보면 그녀로 인해 나의 첫 독일생활 적응의 속도가 날개라도 단 듯 빨랐지 않나 싶다. 많은 고마움이 있지만 나의 후배를 소개해 준 인연으로 조만간 웨딩마치를 올렸으니 빚은 미리 갚았지싶으니. 잘 살아라!


 나는 종교가 없다. 뜬금없는 이야기이지만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아 나의 주말은 단지 휴일이다. 그런 나의 독일 첫 숙소는 종교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한인 교회의 목사님의 거처 한 켠에 있는 방을 내어주셔서 그곳에서 생활했다. 20년 이상을 네덜란드에서 거처하시며 교회를 운영하셨던 목사님께서 독일로 넘어 오셔서 새로 교회를 운영하고 계셨던 터라 내 방의 위층은 교회였다. 주말이면 예배 소리가, 수요일은 새벽마다 쩌렁쩌렁 울리는 커다란 목소리로 목을 놓아 기도를 드리는 신자들의 소리가 언제나 함께였다. 기독교인인 홍차공주는 일요일 예배를 두어 번 함께 했지만 그 뒤로는 이상하게 일요일 아침마다 배가 아프고, 중요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예배에 참석을 하지 못했다. 이상하게 말이다.


프랑크푸르트 시내에 위치한 클라이네마크트(Kleine Markt) 앞 광장은 사계절 내내 노천 마켓이 열려 평일 저녁마다 북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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