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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기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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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주 Mar 30. 2017

프랑크푸르트의 전설이 된 한국인



 주말마다 동네 곳곳을 활보했다. 

독일에 온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났고 초가을 황홀한 날씨에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기에도 적당했다. 운동삼아 두어 정거장은 걸어서 다녔고 매번 다른 길로 다녀보며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렸다. 한번 다녀간 위치나 도로는 잘 기억하는 편이라 한국에서도 <서울 네비>라고도 종종 불렸다. 인간 네비게이션이 되려면 골목정보, 지역 정보의 수집이 필요하지 않겠나 싶어 잠자고 일하는 시간 외에는 주로 야외에서 활보했다. 대동여지도처럼 거하게 시대에 획을 그을 사람은 아니지만 쓸데 없게 인생이 바빠지는 내가 가진 취미 중에 하나였다. 독일의 관광 정보는 한국어로 된 것이 많지도 않을 뿐더러, ‘내가 독일에 있는데 한국에서 관광 정보를 찾아서 돌아다녀야 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정말 유명하다고 하는 곳들도 내게는 그냥 지나치는 동네의 일부분이 되기도 했다. 또 뒤늦게 뒷북을 치는 경우도 많았다.


대중교통인 우반(U-Bahn) 역인 <빌리브란트플라츠 (Willy Brandt Platz)>에서 전설을 마주친 것도 엄청난 뒷북이었다. 독일에 온지 3주가 넘었을 무렵, 이 역에서 재미있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도 강하고 거친 축구로 유명한 독일 프로축구리그 <분데스리가>에서 프랑크푸르트는 사실 볼품 없는 성적의 연속이라 내세울 게 없다. <뮌헨>이나 <도르트문트>, <레버쿠젠> 등의 다른 도시 팀들이 상위 성적을 몇 년 째 유지하고 있는데 반해 황홀했던 성적은 프랑크푸르트 사람들에게 빛 바랜 추억이 된지 오래였다.


프랑크푸르트 시내에서



나는 물론 <독일 축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나 <축구>에 애정은 가득했다. 대학교에 입학 했을 때 나는 늦깍이로 축구에 입문했다. 어문 계열의 학과에서 유독 남자의 성비가 높은 건 내가 수학한 포르투갈어과와 독일어과 정도였다. 선배와 동기들이 옹기종기 과방에 모여 시차도 잊은 채 유로챔피언스리그를 보고 기말 시험을 치르다가 조는 바람에 쫄딱 망한 적도 있었다. 


내가 졸업한 학교에서는 어문 계열 학과들끼리 매년 우리만의 월드컵과 유로 리그를 진행했었다. 이탈리아,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등 다양한 국가의 대항전처럼 학과 간의 축구 시합이 치열했고, 거기에 선수들의 유니폼과 학생들의 응원까지 무언의 열띤 경쟁을 보이던 기억은 외국어 학교만의 특색이자 전통이지 싶다. 하물며 나의 학과는 축구 강대국 포르투갈과 브라질이 있었고, 나는 운동학회의 매니저였다. 밥 먹고 보는 게 축구였다. 2006년 월드컵이 있던 6월, 나는교환학생으로 브라질에 머물면서 축구 열기로 전신 샤워를 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독일 월드컵이 있던 해에 나는 브라질에서, 또 브라질 월드컵이 있던 2014년에는 독일에 머무르는 경험을 했다. 이런 걸 또 조각으로 짜 맞추면 나도 나름 축구와 인연이 있는 여자구나 싶다.

   

나의 이런 축구에 대한 인연과 애정은 독일에서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는 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축구가 없는 날에도 일상복으로 축구 유니폼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주말에는 유니폼과 와이셔츠를 벗고 축구 유니폼을 입는 직장 남자 사람들이 대거 출몰하며 “오늘 경기 있었나?” 할 정도이다. 좀처럼 시원한 성적을 내주지 못하는 프랑크푸르트에게 예전의 화려한 기억 속에 축구 선수들은 어떤 존재일까.



 시내 중심에 있는 전철 역사에 가면 프랑크푸르트의 역대 축구 영웅들을 모셔둔 성지와도 같은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빌리브란트플라츠(Willy Brandt Platz)> 역이다. 플랫폼 한 켠에 세워진 기둥 들에 기둥 전체가 꽉 들어차는 사진으로 영웅을 기리고 있다. 플랫폼 시작부터 끝까지 기둥마다 엄청난기록을 세워 팀 명성에 획을 그었던 축구선수들의 모습이 줄지어 있다. ‘재미있네’라며 훑고 지나가다가‘어?’ ‘어???’하며 멈춰 섰다. 


차범근씨였다. 



그는 <차붐(ChaBoom)>으로 유럽축구에서 80년대를 평정했던 전설로 통했다고 한다. 1979년부터 1983년까지 프랑크푸르트 소속으로 46골을 기록해 주었으니 프랑크푸르트팀에게 큰 공을 세운 전설이 되는 게 당연했다. 독일에서는 독일식 발음으로 <붐큰차>로 불려졌고 내가 종종 상점이나 시청 등에서 마주치게 됐던 독일 아저씨들은 한국인이라고만 하면 ‘붐큰차’를 외칠 정도였다. 2000년대에는 박지성, 2010년 대에는 손흥민, 기성용, 박주호 등의 많은 한국 축구선수들이 유럽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이렇게 한 도시의 영웅으로 만인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건 외국인으로써 차범근씨만의 유일한 대우가 아닐까 싶다. 차범근씨와 자장면 한 그릇을 먹어본 적도 없지만 당당히 명예의 전당에 걸린 사진을 보며 같은 민족이라고 괜한 전율이 머리 끝부터 쭈뼛하게 전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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