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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주 Apr 19. 2017

허리끈도 지갑도 풀어버리게 만드는 독일 아울렛



아울렛에서허리끈도 지갑도 풀어버렸다


 독일에 머물면서 쇼핑을 잊고 살았다. 물건을 사러 백화점이나 상점에 가는 일이 쇼핑이겠지만, 여자들에게 쇼핑이란 나를 꾸밀 수 있는 무언가를 장만하는 행위이다. 가방, 옷, 신발, 액세서리.


분명히 매 년, 매 시즌마다 물건을 사는데 항상 옷장을 열고 신발장을 열어도 ‘입을만한 게 없어.’ ‘신을만한 게 없어.’라는 말만 신기하게도 뱉게 된다. 신발장과 옷장은 꽤나 오랜 기간 입지도 신지도 않은 물건들이 철철 넘쳐나도 뱉어내는 말은 항상 같다. 나 역시도 그런 보통의 여자인데 독일에 와서 특이한 쇼핑 습관을 갖게 되더라. 패션이 아닌, 주방 용품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원인은 명백하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은 법인데, 독일이라는 나라에서 옷과 장신구는 보기 좋은 떡이 아니다. ‘이게 과연 패션 아이템을 팔려고 전시해둔 건가?’라는 의구심이 드는 독특한 포즈의 마네킹은 끓어오르던 쇼핑욕도 차디차게 식혀버린다. 그런 반면에, 주방 용품의 세계는지금껏 내가 한국에서 느끼지 못한 신세계로 다가왔다. 특별히 그릇과 주방 소품이 그것이다. 한국에서 흔하게 접하지 못했던 유럽의 다양한 브랜드 제품들이 한곳에 모여 있는 것을 본다면 없던 관심도 생길수 밖에 없다.


하나 둘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빌레로이앤보흐 커피잔과 접시를 모으기 시작했다. 물론 한국에 돌아올 때에 대부분은 현지에 남은 지인들에게 선물로 남기고 와야 했다.

자취 생활을 처음 시작하게 되거나 이사를 할 때면 영락없이 소품에 눈이 돌아간다. 부모님과 함께 생활할 때면 분명 주방이라는 공간은 엄마이자 아내의 통치를 받는 한 사람 고유의 영역으로 남는다. 냄비 하나 밥주걱 하나도 모두 그녀의 감각과 기호로 정해진다. 오로지 집안을 꾸며야겠다는 욕망과 미적 열망은 나만의 독립 공간인 ‘내 방’에 국한된다. 내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공유하는 공간과 나만의 장소라는 개념을 분리하게 되는 습성이 생겼다. 그런 내가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고, 직장을 다니며 나만의 공간을 갖게 되면 그때마다 나는 나의 공간을 충실하게 채워줄 무언가에 대한 지출에 열을 올렸다. 예쁜 그릇과 인테리어 소품이라고 해도 한치의 의심도 가지 않을 아기자기하고 깔끔한 주방 소품, 게다가 합리적인 가격까지.

 

십대와 이십 대의 여자는 옷과 가방을 사고, 삼십대의 여자는 차를 사고, 사십 대의 여자는 가구를 사고, 오십대의 여자는 그릇을 산다. 나는 훌쩍 오십 대가 되어버린 건지 그릇을 하나 둘 구입하기 시작한다. 독일에서 만난 지인들 덕분에 ‘아울렛’이라는 공간에 입성한 뒤의 나는 사라졌던 물욕과 재회했다. 커피잔, 티포트(tea pot), 테이블매트, 식탁 보, 오븐 용기……한두 달에도 한 번씩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타지의 철새에게 늘어나는 이삿짐이란. 머리에 이고 자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 위안하며 영락없이. 나는. 사고야 만다. 어중간함이 없는 단호박 독일의 아울렛 매장에서의 할인율은 상상을 초월한다. 오만원짜리 그릇 하나가 단돈 오천 원에 구입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면 괜한 패자의 기분이 느껴지는걸 어쩌겠나. 대한민국 언니와 어머니들이 오시면 나의 마음을 십분 이해해 주시리라 100% 확신한다.





독일에서생일 선물

독일에서도 흐르는 시간을 타고 일년에 한번 오는 생일이 돌아 왔다. 

이십 대 후반부터 생일은 명절 다음으로 귀찮은 애물단지 날이 되더라. 명절이면 단골로 물어보는 친척들의 레퍼토리를 듣다 보면 대한민국이 한민족이 맞음을 확신한다. 우리 집도, 남의 집도 어찌 그리 물어보는 내용들이 매한가지인지. 취직하지 못한, 그리고 결혼하지 못한, 결혼해서 몇 년 째 아이를 갖지 않은 등의 사회가 만들어 놓은 평범함의 틀을 잣대로 듣는 사람의 마음에 콕콕 쑤셔대는 말을 듣기 싫어 명절을 기피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이를 하나 둘 먹어가는 건 지극히 당연한일인데, 태어나서 지금껏 자신만의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음을 축하할 일인데. 언제부턴가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라는 이야기가 만연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판매하지도 못할, 날짜가 한참 지난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되어버렸다. 한참 까불대고 동해 번쩍 서해 번쩍 뛰어다니던 철부지 이십 대에서 조금은 성장한 느낌의 지금이 나는 좋은데 ‘나이 들음’에 괜한 눈치를 갖게 하는 생일을 이제는조용히 넘어가고 싶은 삼십 대다.

 

12월의 시내 풍경 @프랑크푸르트, 독일


어릴 때부터 12월의 첫날에 태어난 내가 받는 생일 선물은 장갑, 목도리, 귀마개, 스웨터 등의 겨울이 묻어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발렌타인데이 전후에 태어난 친구들은 초콜릿을, 빼빼로 데이에 태어난 친구들은 몇 년 전부터 빼빼로를 선물로 받는다는 억울함을 토로하는 것에 비하면 나는 양반이다. 그래도 생일에 먹는 것도, 받는것도, 만나는 사람들도 언제나 비슷했기에 나에게 생일이 오히려 특별하지 않은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독일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보다 한 살 어린 내 나이를 축하할 수 있음에 일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어김 없이 독일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저녁식사로 조용히 생일을 넘기나 싶었다. 프랑크푸르트시내에 있는 슈니첼이 맛있는 가게<Leib&Seele>에서 가볍게 레모네이드가 섞인 산뜻한 맥주<라들러(Radler)>와 <슈니첼(Schnitzel)>을먹고 도란도란 수다가 이어질 때쯤 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생일 선물들이 쏟아졌다. 선물이란 건 모든 것이 고맙고 가슴속부터 행복해지는 감동이지만 이번에는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특별한 무언가가함께였다.바로 크리스마스 달력으로 불리는 <아드벤트칼렌다(Adventskalender)>였다. 아마 내가 독일에서 수십 년을 머물렀다면 매년 똑 같은 것을 받아와서 식상해졌을지도 모를 테지만 독일에서의 첫 생일, 생애 처음으로 받은 특별함이었다.




 


아드벤트카렌다(Adventskalender)

독일의 오래된 문화이기도 한 <아드벤트칼렌다>는 12월 1일부터 크리스마스 전날인24일까지 그날 그날의 서프라이즈 선물이 24개의 각기 다른 주머니에 들어 있는 종교적인 선물이다. 성탄절이 되기 전 일요일부터 4주 동안 예수의성탄을 기다리는 교회력의 절기인 대림절(Advent)을 맞아 아이들이나 연인, 가족들끼리 주고받는 것이라는데 대부분이 초콜릿이나 과자, 작은 레고(Lego)장난감 등이 들어 있다. 내가 받은 것은 초콜릿 브랜드 린트(Lindt)에서 나온, 궁극의 달달함이 생명인 초콜릿이 가득 들어있는 달력이었다. 내가 단 걸 좋아하지 않고 초콜릿도 먹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특별한 게 없었다며 홍차공주는 수줍게 선물을 건넸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그날에 해당하는 요일의 문은 내가, 그 안에 들어있는 초콜릿을 꺼내 먹는 건 그녀의 몫이 되었다. 맥주회사에서는자그마한 미니어처 병맥주 24병이 들어있는 성인용 제품을 출시했다는데……꿀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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