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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기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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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주 May 31. 2017

나의 첫 독일 남자 사람




독일남자 사람

갑작스럽게 한국에 다녀오며 나는 기르던 머리를 싹둑 잘랐다.

까맣고 긴 생머리의 동양 여성은 서양인들 사이에서 꽤나 매력적이라는 얘기를 오래전부터 주워 듣고는 독일에 오며 긴 생머리를 무기로 여겨왔으나 석회질이 상상할 수 없게 많이 섞여 있는 물에 장사 없다며 머리카락은 오일이건 영양제이건 무엇이라도 발라주지 않으면 푸석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외모에 보통의 여성에비해 신경을 쓰는 시간이 현저하게 떨어진 나로서는 관리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자진해서 학창시절에도 자르지 않았던 짧은 단발머리로 변신했다. 긴 생머리를 어렵게 관리한들 나에게 설레는 인연이 생기지 않았다는 헛헛한 현실이 로망에 대한 미련을 싹둑 끊어내게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금요일에 약속이 생겨 급하게 일본어 회화 약속을 토요일로 미뤄 그날 오후, 가리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왔다.에스반을 타고 중앙역에 도착하여 우반을 갈아타고 뢰머 광장으로 향할 참이었다. 오랜만에 그 동안 입지 않던 화려한 패턴이 수 놓인 검정색 원피스에 9cm의 하이힐, 곧 다가 올 봄을 미리 알려주는 듯한 초록색 하늘거리는 가디건을 입고나니 독일에서 멋을 부린 건 꽤나 오랜간 만이었다. 유난히 햇살이 좋은 날에 일본어 공부를 하겠다고, 그것도 독일에서 스페인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는 게 살짝 아쉬움을 자아낼 만도 하지만 날이 좋아 모든 게 좋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좀처럼 성적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프랑크푸르트 축구팀의 경기가 있는 날인지 정류장엔 그들의 유니폼과 응원 도구들을 온몸에 장착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좀처럼 오지 않는 트램을 기다리며 뻘건 유니폼 그룹에서 팔짱을 낀 채 혹여 과격해진 응원단과 부딪힐까 몸을 최대한 가늘게 만들려 노력하는 찰나에 누군가 슬며시 내 옆으로 다가오는 게느껴졌다.


여자의 시야는 남성보다 넓다고 하지 않나. 분명 아까부터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던 어떤 남성이 내 옆으로 다가와서 말을 걸지 말지를 혼자 고뇌하듯 몸을 좌우로 움직이는 게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곁눈질로 본 덕에 남자의 얼굴은 보지 못했으나 하이힐을 신어 175cm는되어 보일 내 눈으로 올려다 봐야 하니 180cm는 쉽게 넘어 보이는 체격이었다. 차마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야속하리만큼 오지 않는 트램이 와야 하는 왼 켠으로 똥마려운 강아지마냥고개 돌리기를 반복하기만 했다.


“저기요”

“……”

“축구 보러 가세요?”

“저 독일어 못해요.”


아니. 하이힐에 짧은 원피스를 입고 어느 누가 축구를 보러 가겠냐고 생각이나 하겠나 싶다가도 돌이켜 생각하면 그도 나에게 말은 걸고 싶고 할 말은 없으니, '그런 뜬금없는 말로라도 나와 대화를 하고 싶었구나' 싶다. 나는 또 어땠고. 축구 보러 가냐는 말에 안 간다고 하면 될 것을 처음부터 철벽녀처럼 독일에서 독일어 못 하는 게 자랑이라도 되는 듯이 벽을 쳤다. 그 말이 그에게 어떻게 다가갔는지는 몰라도 그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유창한 영어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어디에 가냐며, 본인은 회사에서 티켓이 나와 프랑크푸르트 팀을 응원하지는 않지만 축구를 보러 간다고, 이 곳에 사냐고 멈추지 않고 속사포처럼 질문을 이어갔다. 


구세주처럼 마침 멀리서 내가 타야 할 트램이오는 것이 보였다.


“미안한데 나는 지금 저 트램을 타야 해”

“그럼 시간 될 때 다시 만날 수 있을까?연락 기다릴게.”


하이힐에 온갖 멋을 들인 내게 축구장에 가냐고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던 것 치고는 꽤나 적극적인 모습으로 금발의 독일 남성은 본인의 명함을 한 장 건넸다. 나도 모르게 그 명함을 받아쥐고는 트램에 타서 밖에서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손까지 흔들었다. 나와 그의 사이를 모르는 사람들이이 모습을 보면 분명 연인이라 생각할 정도로 나와 그는 웃으며 트램이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독일에서 왠 명함


독일 형제, @카나비 스트리트, 런던

가리는 자신을 만나기 전에 나에게 일어난 얘기를 전해 듣자마자 커피숍이 떠나가라 크게 웃으며 그 사람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거라고 장담했다. 어떻게 모르는 여자한테 다가가서 말을 걸 수 있으며 명함을 왜 주냐고……이곳에서 여자를 만날 거면 없는 명함도 만들어야겠다며 물 난 고기처럼 비아냥대기 시작했다. 동생이 없는 내게 꽤나 신기한 것도 많고 잔소리 할 것도 많은 가리는 내가 만약 동생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 거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가리, 너는 참 동생 같아서 좋아.

그런데 네가 나의 동생이 아니라서 더 좋아.

네가 만약 내 동생이었다면 나는 네가 너무 얄미워서 항상 괴롭혔을 거야.


그의 반박에도 일주일이 지났을까. 화장대 위에 고이 모셔둔 명함에 적힌 회사 메일 주소로메일을 보냈고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연락이 왔다. 그리고 나와 그는 독일과 영국을 넘나들며 몇 번의 데이트를 했고 인연이 아닌지 그렇게 만남을 마무리 했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독일 남자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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