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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기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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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주 Jun 07. 2017

트램 타고 떠다니기, 프랑크푸르트



내가 보고 싶었던 하루

아침 일찍 볼일이 있어 집을 나섰다. 하늘이 참으로 맑고 파랗다. 일을 보고 나면 두 시간 정도가 걸릴 텐데 돌아가는 길에도 이 푸르름은 계속 될 테다. 그러니 오늘은 오랜만에 일광욕을 하면서 하루를 즐기기로 했다. 집 앞의 역에서 에스반(S-bahn)을 타고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 내려 우반(U-bahn)을 갈아탔다. 나는 우반을 타는 것이 유난히도 좋다. 가느다란 전선과 견고한 철로에 몸을 맡긴 채 느긋하게 도심을 가르는 전차는 어릴 때 놀이동산에서 타던 꼬마 열차와 흡사하다. 바람소리를 내며 휙휙 지나쳐버리지 않는 바깥 풍경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고 정류장마다 타고 내리는 이곳의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나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트램에 올라타니 문득 충동이 생겼다.


어디든 가볼까?

가끔 버스를 타고 가면서 목적지를 지나쳐버리고 싶은, 또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에서 나도 모르게 전혀 다른 노선의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흘러가버리고 싶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우반을 세 번 정도 내리고 타는 것을 반복하며 동네를 산책했다. 내가 사는 서쪽이 아닌, 오랜만에 동쪽으로도, 또 남쪽으로도 뱅글뱅글 도시를 돌았다. 그러는 동안 얼마 전 지인이 가져다 준 책을 펼쳐 읽어 내려갔다. 청소년기를 모두 보낸 일산에서 대학교가 있는 이문동까지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왕복 세 시간씩 책을 보며 굳혀진 습관은 대중교통에서 문서를 어지럼 없이 읽어내는, 어디에 딱히 자랑질하며 내놓지는 못하는 내가 가진 특기이다.



책의 이름은 <내가 보고싶었던 세계>로 한인 여성 최초 하버드 법대 종신교수, 30대에 당당했던 석지영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나와는 다른 너무나 화려한 집안과 배경에서 자라나 누구나 바라는 멋진 삶을 살고 있는 한국 여성의 일종의 자서전 한 편이었다. 평소의 내가 보던 책의 유형과는 거리가 먼 책이었지만 지금의 두려움을 잊고, 도전하고 노력하라는 격려의 메시지가 잔뜩 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내 지인이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선물이라며 준이 책에 담은 것 같다. 진심으로 원하는 길이 있다면 도전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에 두려움을 갖지 말것, 또 정해진 틀에 본인을 가두지 말것......책을 읽는 사람들에게저자는 당부하고 있었다.

대단한 삶을 살았고 현재도 멋진 인생을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한 여성의 이야기를 천천히 흐르는 트램 속에서 너무도 빨리 읽어내려갔다.


아침의 계획보다 늦게 마인강에 도착했다

오늘의 나의 로망은 마인강변에서 책을 읽는 것이었는데 아쉽게도 트램에서 가져온 책을 모두 읽어버렸다. 또 대학 시절부터 가방에 항상 챙겨 다니는 1인용 돗자리를 깜박하고 집에 두고 왔다. 불어오는 봄 바람에 오랜만에 멋을 내어 짧은 치마를 입고 온 터라 풀섶에 털썩 앉을 수만은 없었다. 겨우내 굳게 닫혔던 강변에 한 까페가 문을 열었다. 멀리서는 빈 테이블이 있는지 확인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서 햇볕을 벗삼아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평일 오후 두 시쯤의 마인강은 이런 모습이구나.



내가 도착하자 기막힌 우연으로 자리를 뜨는 커플이 있어 얼른 가서 자리에 앉았다. 살짝 출출한 배를 채우려 감자튀김과 필스(pils) 한 잔을 주문했다. 테이블에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메뉴판을 내려 놓는 직원에게 독일어로 주문을 했다.직원은 내게 독일어를 잘한다고 칭찬했다. 이건 분명 외국인이 한국에서“안녕하세요” “나 김치 좋아합니다”등의 말을 내뱉을 때의 상황임에 틀림없다. 독일에 와서 감자튀김과 맥주를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먹을 때마다 입 밖으로 꺼내본 것만 계산해도 꽤나 많은 연습이 되었으니 독일어 잘 한다는 소리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다.


감자튀김 하나와 맥주 큰 걸로 하나 주세요.



평일 한 낮에 아무렇지 않게 맥주를 주문할 수 있는 건 이 곳에 보이는 절반이 넘는 테이블의 위에 맥주잔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물론 간혹 혼자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컴퓨터를하거나 노트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나도 커다란 테이블의 쓸쓸함을 달래주려 노트북을 꺼내 글을 몇 자 적었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과 유유히 흐르는 마인 강, 이른 봄의 따스함을 만끽하는 사람들이 순간 멈춰있는 사진처럼 느껴졌다.



저녁 약속 시간까지는 줄곧 마인강에서 시간을 보냈다. 책을 읽고 컴퓨터에 글을 쓰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두어 시간을 보냈다. 이런 때는 생각이라는 것도 머리에서 꺼내두고 따스한 공기가 불어 머리 속을 청소하게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치유 받는 느낌. 누군가가 나를 어루만지거나 쓰다듬지 않아도 내 스스로가 나를 치유하는 방법은 살아가면서 하나 둘 배워간다.



오랜만에 훌륭한 하루를보내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사귄 지인들과 저녁을 먹었다. 오랜만에 중식이다. 터키타운한 켠에 위치하여 대부분이 중국인 손님들이지만 독일인들도 종종 보인다. 한국에서도 쉽게 선택하는 메뉴가 아니었던 양장피도 주문했다. 그 동안 먹어왔던 양장피의 맛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신선하고 풍성한 재료와 진한 풍미가 독일인의 식탁만큼 큼지막한 그릇에 가득 담겨있다.





저녁을 먹고 난 뒤에도 밤거리는 해가 아직 남아 있다. 찬 기운이 피부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저녁이니 분명 봄이 어슬렁거리고 있다. 날이 풀려서인지 어디든 야외 테이블이 있는 까페나 펍에 독일사람들이 북적대는 통에 편하게 앉아 차 한잔을 나누며 밀려있던 수다를 풀어 놓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더욱이 오늘은 축구 경기가있는 날이니 축구에 살고 축구에 죽는 독일의 TV가 놓인 가게들은 어딜가나 문 앞까지 사람들이 바글바글 하다.


자일 거리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했다. 때 아닌 아이스크림 퐁듀를 주문했다. 과일과 아이스크림 조각들이 뜨거운 초콜릿과 함께이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은 어찌나 빨리 흐르는지. 금세 막차 시각을 확인하게된다. 달콤한 초콜릿에 시원 상큼한 봄이 퐁당 빠져든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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