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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기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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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주 Jun 09. 2017

몸이 멀어져야 마음이 가까워지는 사이

(a.k.a. 대한민국 보통의 남매)



5년의 공백

나에게는 한 살 많은 오빠가 한 명 있다. 정확히21개월의 터울이지만 내가 십이월에 태어나는 바람에 한 살 차이가 되었다. 집안 어른들의 얘기로는 둘의 사이가 어릴 때는 서로 없으면 안 될 존재로 막역했다고 했으나 사춘기의 고등학생시절에는 그야말로 매일이 전쟁이었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맞벌이를 해 오신 덕에 나와 친오빠만이 집에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연년생에게 사춘기가 손을 붙잡고 같이 온 것인지 예민한 시기가 겹쳤다. 다른 집 형제들은 어떻게 자랐는지 모르겠으나 우리의 고교시절은 사람이 사람을 계단에서 집어 던지는 수준으로 꽤나 격렬했고, 친오빠가 대학생이 됨과 동시에 우리의 격정적인 애증의 관계도 종지부를 찍는 듯 보였다. 


그 뒤로 수능 시험을 보다 듣기 평가 시간만 되면 잠을 쏟던 내가 재수를 시작하며 남양주 끝자락의 축령산으로 떠남과 동시에 나의 방랑 생활이 시작되니 친오빠와 마주칠 시간은 줄어들었다. 뇌수막염으로 이번 생애에 다시 찾아올 일 없는 사십삼 킬로그램의 체중을 갖게 되어 수능을 몇 달 남겨두고 내가 집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친구를따라 해병대에 가겠다고 친구들과 동반입대를 꿈꾸던 친오빠가 친구들 중 유일하게 붙어 홀로 유유히 해병대에 들어가 지금은 사라진 멋진 몸매와 날렵한턱선을 가지고 돌아오기까지, 내가 교환학생으로 브라질에서 한차례의 어학원 수업과 한 학기의 정규 과정과남미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기 까지, 또 곧장 이과생도 영어가 중요하다며 친오빠가 어학연수로 호주를 다녀오기까지. 남매가 한 차례씩 반복하며 집을 떠나니 눈에서 멀어진 만큼 우애가 싹텄다고 할 정도로 둘의 관계는 호전되었나 싶었다.



대학을 졸업할 때 일년을 학교 앞에서 자취하던 내가 집으로 돌아오니 친오빠와의 관계는바람 앞의 등불로 치솟기 시작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유도 생각나지 않는 것들로 잦은 말다툼이 벌어졌고나의 못된 습관이자 세상을 살아가는데 유용하게 쓰이는 ‘말 안 하기’를 친오빠와도 시도했다. 2008년 여름의 일이고 그 이래로 우리 둘은 함께 밥을 먹지도 이야기를 나누지도않게 되었다. 엄마가 괜한 메신저가 되어 적막한 둘 사이의 보이지 않는 끈을 잡고 있었고 지금 돌이켜도이런 게 불효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날들이었다. 그리고 대화도 없이 나는 독일로 떠났다.


어느 날 카카오톡 메시지 알람이 울려댔다.


“잘 지내고 있어?”

“어려운 일은 없어?”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해. 용돈 부쳤다.”


나와 친오빠 사이에 전쟁이 끝났다고 확신할 수 없으니 휴전인 걸로. 서울을 찾은 여동생 지인의 임진각 차량가이드를 해주며 총, 전쟁, 군대식 용어를 자연스레 영어로 설명해줬다.


 5년의 정적을 깬 건 친오빠였다. 내가 경찰에 출석하러한국에 들어갔다가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걱정이 된 건지 연락이 왔다. 꽤나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그 사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존재를 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한 밤중이니한국은 이른 아침쯤일 테다. 꽤나 오랫동안 말라 있었던 눈시울이 차 올랐다. 5년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건지, 따뜻한 울타리를 박차고 무엇을 위해 떠나 온 건지, 그 속에 내가 지금행동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어느 누구에게 털어놓지 못한 일들이 빠르게 귓가를 스쳐갔다. 가족과 떨어져 항상 혼자라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해오던 나는 두 시간을 내리 울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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