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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패티 Nov 14. 2019

아름다운 이별사

요즘 생각

레이먼드 카버가 믿고 살았다는 인생의 법칙이 있다.

'가장 좋은 것을 써버리고는 더 좋은 것이 생기리가 믿는 것'.

카버도 생활비를 걱정했던 시절이 있었다.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로 단편을 쓸 수밖에 없었던.

미래를 위해 물건을 쌓아 두지 않고 오늘 가지고 있는 것 중 제일 좋은 것을 쓴다는, 그리고 더 좋은 것이 생기리라 믿는 믿음은 나처럼 소심한 삶에서 나온 터득은 아닐 터다.

   

 방마다 책장에 책이 이중 삼중으로 주차되어 있다.

날을 잡아 정리하며 버리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준 책도 적지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다.

누군가에게 받은 책도 있고, 전에 읽었으나 지니고 싶어서 새로 산 책도 있고, 있는 줄 모르고 또 산 책도 있다.

내 책이 아닌 책도 있다. 오래전에는 책 뒷장 안쪽에 빌린 사람 이름과 날짜를 적은 카드를 넣어 두는 포켓이 있었다. 이 카드에는 책을 빌린 친구 이름이 적혀 있다. 친구가 빌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책, 즉 도서관에 반납을 하지 않은 책도 있다. 책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던 시절의 이야기다.  


책이 쌓이는 걸 줄여보고자 e북으로 책을 사 사보기도 했으나 앞으로 즐겨 살 것 같지는 않다.

책장을 넘기는 손맛도 없지만 무엇보다 종이책을 읽는 것처럼 읽히지 않아서다.

이래 저래 책이 좀 많은데 심플하게 살고자 하여 다른 것도 아니고 책을 버릴 수 있을까?    

책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나를 합리화하는 이유는 또 있다.

건축 저술가 임석재 선생은 <한국의 글쟁이들>에서 글을 쓰기 자료에 대한 철학을 ‘눈덩이론’이라고 했다.

자료는 눈덩이 같아서 어느 정도 규모가 돼야 굴러간다 해서 붙인 이론인데,

쓸모없다 해서 어떤 자료를 버릴 경우 나머지 자료들도 같이 무용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임석재 선생의 반열에 내가 든다는 게 아니다.

비록 나와는 다른 이유이기는 하지만 책을 버리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가진 저명한 인사를 동지로 둔 것 같아 든든하다.      

  

나처럼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가 보다.

책방에 가면 잘 버리기, 심플하게 살기, 1일 1 정리 등

잘 버리고 잘 정리하는 비법을 전수하는 책이 한 코너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책 중 하나를 골라 그 책에서 일러주는 방법으로 요즘 유행하는 미니멀리스트로 살아볼까 생각했다.

정리 대상은 우선 책.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포기하고 말았다.

무얼 남기고 무얼 버릴 것인가를 가리는 일부터 불편했다.

당장 쓰지 않는다고 해서 나중에 아쉬운 때가 오면 아쉽지 않을까 아직 오지도 않은 걱정도 했다.  

어떤 사람은 본 책은 모두 미련 없이 버린다는데, 어디 기증할 것도 없이.  

아무튼 언젠가 책들을 떠나보낼 때가 내게도 올 것이다.

그걸 당겨보자. 방법을 조금만 바꾸기로. 큰맘 먹고 할 게 아니라 매일 조금씩, 매일 빗자루로 청소하듯이.

적어도 1년 이상 안 본 책들을 눈에 띌 때마다 꺼내놓았다가 매주 쓰레기 수거하는 날 한꺼번에 밖에 내놓고 있다.

아까워하거나 안타까워하는 대신

"잘 가라. 그동안 수고했다. 너로 해서 내가 덕을 많이 봤다. 고마웠다."

좋은 이별사를 붙인다.


레이먼드 카버의 버림으로써 써 버림으로써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은 잘 버릴 줄 아는 용기에서 나온 게 아닐까. 그의 지혜를 빌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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