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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패티 Nov 21. 2019

엄마가 다이어리에 쓰실 게 뭐가 있겠어

요즘 생각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한 것은 언니에게서 졸업 선물로 자줏빛 가죽커버로 장식된 다이어리를 받고 나서부터다. 색색의 펜을 이용하여 이것저것을 메모할 때마다 마치 작품 하나를 완성해가는 예술가의 기분까지 들었다. 친구와 만나기로 한 장소와 시간, 본 영화, 수다 떨었던 카페 이름, 가족과 친구의 생일, 올해 읽은 책 목록, 이달의 목표 등등 적어나갈 내용은 끝이 없었다.


 해마다 새해가 오면 새 다이어리로 바꾸어서 같은 일을 꾸준히 해왔다. 어쩌다 다이어리를 쓸 수 없는 날이면 마치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한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지나간 다이어리를 펼쳐보면 그 해의 그 날에 어떤 곳에 갔으며 누구를 만났고 만나서 무슨 일을 했는지가 꼼꼼히 기록돼 있어, 그날의 일들이 즐거운 혹은 안타까운 일로 기억나고는 한다. 


 어느 날 우연히 어머니가 다이어리를 쓰시는 걸 보았다. 어머니도 다이어리를 쓰시는 줄은 몰랐다. 그동안 어머니가 다이어리를 쓰시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데다, ‘어머니와 다이어리라니’ 둘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관계처럼 여겨져 나도 모르게 ‘풋’ 웃음이 나왔다. 


  어머니는 연로해지시도록 평생을 전업주부로 사셨다. 연세가 드신 후로는 외출이라고 해야 매주일 가는 성당, 수요일마다 가는 문화센터 노래교실이나 시장, 옆집 마실을 다녀오시는 정도다. 그리고 일 년에 서너 번 가는 동창모임이 전부인데 어머니가 다이어리에 메모해 둘게 뭐가 있을까 싶었다.


  “나도 나름대로 메모해 둘게 많어. 젊은이들만 예쁜 다이어리 쓰라는 법 있니?”


  그 후로 며칠이 지났다. 모처럼 집에 혼자 남아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다가 문득 어머니가 쓰시던 다이어리가 생각났다. 무엇을 쓰시는지 궁금증이 일어 어머니가 쓰시는 방으로 올라갔다. 다이어리는 어디에 두셨는지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다이어리는 화장대 서랍 속에 들어 있었다. 연한 녹색 가죽 커버를 한 제법 두툼한 다이어리 표지를 한 장 넘겼다.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았다. 몇 장을 더 넘겨보았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말갛게 하얀 종이가 평소 어머니 고요한 모습 같았다.


 ‘이럴 줄 알았어. 엄마가 쓰실 게 뭐가 있으시겠어.’ 


 나는 다이어리 뚜껑을 덮으려다 눈에 띄는 게 있어 다시 펼쳤다. 노인 특유의 글씨체로 쓰인 글씨가 눈에 띄었다. 


  “3월 20일, 큰애 영명축일, 식구들이 일찍 들어와서 큰애의 영명축일을 축하하며 소고기를 구워 먹었다.”


  다이어리 몇 장을 더 넘겼다. 일자 별로 메모를 하도록 디자인된 어머니의 다이어리는 백지로 이어지다 어느 날 불쑥 한 줄 메모가 보였다. 그런 식으로 다이어리는 백지의 날들이 이어지다가 ‘둘째가 찾아왔다. 김치 한 통 보냈다.’ ‘아직 이른데 오이 한 접을 사서 오이지를 담갔다’ 와 같은 소소한 일들이 문득문득 생각난 것처럼 기록되어 있었다.


  두터운 다이어리의 한 페이지에 두어 줄짜리 짧은 메모는 어머니의 좁디좁은 생활 반경을 보여주는 듯했다. 경치 좋은 곳을 구경했다거나, 그 흔한 영화 한 편 보았다는 기록도 없었다. 온통 가족과 함께이며 가족을 위한 것이 어머니의 주요 일상이었다. 그것들이 어머니 다이어리에 담길 만한 것이었다. 어머니라고 하다못해 영화 한 편 보고 싶은 생각이 없으셨을까, 왜 나는 어머니께 영화구경 가자는 얘기 한 번 하지 않았을까. 어머니와 꽃구경 간 게 언제 적 일인가. 가슴이 무거워졌다.


 해마다 나는 새해가 되면 새 다이어리를 준비한다. 몇 번인가 어머니께도 새 다이어리를 사다 드리고는 했다. 그러나 이제 다이어리를 쓰실 어머니는 안 계신다. 늦은 연세에 쓰시기 시작한 어머니의 다이어리는 몇 권으로 끝나고 말았다. 날짜별로 쓰는 다이어리는  쓸 게 없는 날 빈종이로 넘기는 게 마음에 걸려 날짜를 쓰면서 메모할 수 있는 것으로 사다 드렸다. 그 후로 어머니의 다이어리에 백지는 줄었다. 


 책장 한 칸에는 내 다이어리와 함께 어머니의 다이어리도 정리되어 있다. 이제는 계시지 않지만 어머니의 다이어리를 볼 때마다 무심한 듯 말씀이 없으셨던 생전의 어머니를 뵙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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