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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패티 Dec 19. 2019

미안하면 웃기라도 해야지

요즘 생각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향년 92세였다.  병상에 누우신 지 4년, 알츠하이머로 크게 고생하셨다. 그러다 생명 유지를 위해 온전히 인공 장치에 의지시간이 그 절반, 2년 남짓 흘렀다. 여러 가닥의 생명줄, 숨이 완전히 멎어서야 그걸 다 떼어내셨다.  그간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알고 문상을 온 사람들은 어머니가 사시는 게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라거나, 병원은 그렇게 장사를 한다고 조용하게 말했다.


입관  때 마지막 뵙는 어머니가 하도 작아서 아들을 다섯이나 낳았다는 게 상상이 안됐다. 수의는 한두 겹이 아니다. 겹겹이 껴입고도  어른 손 한 뼘 폭 칠성판에 온몸을 뉘고 계셨다. 버리고 소진한 미이라가 돼서야 찍은 마침표. 죽음을 알지 못하는 어린 증손이 할머니를 보려고 꽃 장식 아래 이곳저곳을 들여다 보고 문이란 문은 죄다 열어 보았다. 그러고도 할머니를 찾지 못하니 제 엄마에게 가 매달렸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거는 그렇게 안 보이게 된 거라며 제 엄마가 안아주니, 뭘 알아서일까 아이가 서럽게 우왕우왕 울어댔다.  


자식들은 죄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두들 말수도 행동도 느리고 무거워졌고, 여자들은 립스틱을 바르지 않았고 남자들은 면도를 하지 않았다. 조카가 낳아서 안고 온 어린 아이들을 보면서도 환하게 웃을 수 없었다. 나는 더 미안했다. 어머니께 미안하고 형제들에게 미안하고. 자주 가 뵙지 못해서 미안하고, 더 사랑하지 않아서 미안하고---. 미안하면 웃기라도 해야지. 나는 웃지 못했다. 미안해서. 이생에서 어머니의 시간  92년을 두고, 사람들은 어머니가 천수를 다하셨다, 사시느라 오히려 고통이 길었다는 하는데 그 말은 미안해하는 사람을 두고 들으라는 듯했다.


하도 많이들 얘기해서 나만이라도 안 하고 싶은 이야기,  IMF. IMF가 나던 해, 서울 외곽에 5층짜리 건물을 짓고 있었다. 그동안 키워온 꿈의 결실이 눈 앞에 와 있었다. 대지 200평에 연건평 400여 평 건물주가 되는 꿈. 집을 팔고 대출을 받은 돈으로. 골조를 세우고 한층 한층 꿈도 같이 올렸다. 일찌감치 1,2 층은 임대가 나가고 모든 일은 순조로웠다. 남편은 자신이 설계하고 짓는 집이어서 어느 한 곳도 허투르 할 수 없었을 집. 구석구석 남편만의 특징이 잘 설계된 집이었다.


국가부도라니, 상상도 못 할 일이었고, 더욱이 우리에게 닥쳐올 고난은 조금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준공식 날 IMF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그렇다.  IMF사태가 터졌다는 말보다 이 상황을 더 잘 설명하는 말이 있을 테지만 우리에겐 긴급한 사태가 터진 것일 뿐이었다. 임차한 사람들은 해지에 따른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모두 해약했다. 집은 다 지어졌으나 빈 건물이었다. 집을 짓느라 빌린 돈은 그대로 빚이 되었고, 은행에 이자를 넣어야 할 날은 하루도 어김없이 돌아왔다. 은행은 하루도 기다려주지 않고 독촉을 했다.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이 왜 자살을 하는지 이해도 할 것 같았다. 어머니와 특별히 사이 나쁠 일 없었던 나였지만 IMF는 어머니와 나를 서먹한 사이로 만들고 말았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전화를 하셨다. 걱정을 하시면서, 힘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시면서. 하루 이틀 사흘, 어머니의 전화는 거르는 날이 없었다. 좋은 말도 자꾸 들으면 욕하는 것 같은데, 어머니 전화가 외려 아침마다 우울한 일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누구의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때였다. 어느 날엔가는 우리가 잘 알아서 할 거고, 그런 말씀하실 거면 다 알고 있으니, 말씀 듣는 것도 힘드니 전화하지 마시라고 했다. 어머니는 크게 당황하시며 곧 심정을 이해한다고 또 미안하다며 전화를 끊으셨다. 그리곤 정말 전화를 하지 않으셨다. 당시 나는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릴 여유가 조금도 없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르고 어머니와의 서먹함은 가셨으나 어머니는 이후로도 더 이상 전화를 하시지 않았다. 없었던 일처럼은 안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세상에 더 이상 안 계신다는 것이 전혀 실감 나지 않는다. 실감난다는 것은  살면서, 나 여기서 살아가는 동안 문득문득 생각나고 그립고 눈물 나고 하는 거겠지. 더러 놀라기도 할 테지. 지나는 노인을 보면서 어머니 옷자락을 본 것 같아서, 노인의 기침소리가 어머니 기침소리 같아서. 그러다 차차 희미해지겠지. 산 사람은 사는 거라면서.


모두 돌아가시고 한 분 남은 아버님의 누이, 시고모님이 오셔서 눈물을 흘리셨다. 자식들이 형님 부음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서러워하셨는데, 시고모님의 눈물의 이유가 어머니의 부고 때문인지, 소식을 알려주지 않은 자식이 야속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고모님을 생각한 자식들의 뜻이었을 테니 너무 서운해 하지 마시라고 위로해 드리니 다시 어머니 빈소에 술잔을 올리며 곡을 하셨다.


사흘은 금세 지나갔다. 장지엔 우리보다 까마귀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일꾼들이 파 놓은 광 속에 어머니 관을 내려놓고 흙을 내리면서 발로 다지고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우리 일은 마무리당했다. 일하는 사람들이 강제하듯  마무리를 시켰다. 여기 더 머물지 마시라, 절을 한 후 뒤돌아보지 마시라, 미련이나 안타까움이나 설움도 남기지 말고 앞만 보고 가시라, 장례 주례사가 거듭 강조했다.  마지막 절을 올리고 하나씩 하나씩 장지를 떠나올 때 까마귀들이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며 '까아아똑 까아아똑' 거렸다. 어린애들은 까마귀들이 카톡을 한다며 어른들 뒤에서 입을 가리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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