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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패티 Dec 28. 2019

나 혼자 큰 것 같아요

요즘 생각

언제부터 아이 혼자 병원을 보냈더라?

그 처음이 언제인지 정확한 날짜는 생각나지 않지만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고부터 혼자 병원을 다녀오게 했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다녀와서 아이가 전해준 이야기는 혼자 왔다고 의사나 간호사는 대견해 하는데 아이를 혼자 병원 보내는 모진 엄마라고 수군거렸단다. 남들이 뭐라든 아이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다. 일하는 엄마들 겪는 곤란한 상황은 도처에서 일어난다. 나는 진료실에 아이를 혼자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일하는 엄마의 애환이 있었으나 아이의 담대한 태도에 위로를 받기도 했다.


나는 말이 좋은 프리랜서였다. 당시는 학부모를 대상으로 자녀의 독서와 글쓰기 지도 강의를 하는.

나는 일이 있을 때와 없을 때가 불규칙한 강사다. 그것도 대개는 다중을 상대로 하는, 말하자면 강연이었다. 하루 쉬자고 하거나 시간을 변경하자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이가 아픈 것을 예정할 수 없는 일이어서 그야말로 우리 모녀는 일찌감치 각자도생 하며 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까지 하며 일을 해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눈 다래끼가 유난히 잘 생기던 작은애는 다래끼 치료를 위해 이미 몇 차례 혼자 병원을 다녀온 경험도 있었고, 약을 먹으면 이내 염증이 가라앉고는 해서 하굣길에 다녀오라고 했다.

그런데 이번엔 약을 타 먹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콩다래끼여서 눈꺼풀을 째서 고름을 빼야 했다는 얘기를 갔다 와서 들려주었다.

"콩처럼 단단해진 고름 덩어리를 칼로 째서...."

갑자기 말을 하던 아이의 음색이 바뀌었다.  

"고름을 짜내던 의사가 '아플 텐데 잘 참네요' 하는 거예요. 아프긴 했어도 씩씩했는데, 그 말을 들으니 문득 서러워지더라구요. 나는 나 혼자 큰 것 같아요."


그날도 병원 예약은 내가 해 놓고, 아이는 하굣길에 진료를 받았다. 이야기를 들으며 안쓰러워서 안아주려는 나를 아이는 매몰차게 밀쳐냈다. 놀라며 아이에게서 손을 내렸다. 늘 씩씩했던 아이, 걱정말라던 아이였는데, 달라진 태도에 당황스러웠다. 오랫동안 참았던, 묻어두었던 서러운 이야기를 풀어내며 아이는 더욱 서러워했다. 이야기를 듣다 둘이 끌어안았는데 눈물이 왜 쏟아지던지. 세상 설움을 둘이 다 가진 양 마주 보고 쿨럭쿨럭 울다 쿡쿡 웃고, 다시 쫄쫄쫄 울고 했다.     


살뜰히 보살피지 못했어도 해가 바뀌면 아이는 어김없이 학년이 올라가고 상급학교로 진학을 했다. 걱정하는 내게 ‘잘할 수 있으니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할 만큼 엄마 형편을 이해하는 아이였다. 그게 작은아이였으므로 그애는 정말 씩씩하다고, 은연중에도 생각하고 있었다. 뭐든 거침없고  당당해서, 노심초사하는 성격인 나는, 내가 엄마라는 사실을 잊은 채 아이의 그런 점을 부러워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는 아이였던 거다.     


 작은애는 동생이라서 보는 손해가 있다. 아무래도 집안 분위기가 큰애의 성장에 따라 돌아갔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언니가 중학생이 되면 집안 모드도 중학생이 되고, 큰애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집안 모드도 고등학생에 맞추어 돌아간다. 작은애 입장에서는 고작 초등 4학년이 되었을 뿐인데 집안은 중학생 모드로 돌아가고 있고, 겨우 중학교 입학했는데 집안은 다시 고등학교 모드로.

  

어느 날 작은애가 자기는 초등학교는 3년만 다녔고, 이후 중고등학교는 각각 3년씩 당겨서 다닌 것 같다고 말을 했다. 그 애가 그렇게 말할 때까지 큰애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심 없이 당연한 일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나는 왜 작은아이가 그런 불편을 겪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앉은자리에서 튀어 오를 정도로 놀랐다.


'여자가 일을 하면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진다'. 일을 하느라 소득이 있지만 그만큼 돈이 들어갈 데가 생겨 결국 남는 게 없다는 뜻이고,  엄마가 아이를 돌보지 못하니 구멍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럴 수도 있다. 아이들은 제각기 다양한 환경에서 자란다. 아이에게 어떤 환경이 최선인지 알 수는 없다.

 엄마들에게도 육아 여건은 제각각이며,  큰애에게 맞았던 육아법이 작은애에게도 맞는다 장담할 수도 없다.

엄마와 아이를 둘러싼 상황이 어떻더라도 아이는 자란다. 엄마의 보살핌이 언제까지나 필요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아이를 구석구석 보살피는 엄마가 아니었지만 아이는 성인이 되었다. 제 삶의 몫을 곧잘 감당할 만큼 성장한 아이는 웬만해서는 노여움이나 서러움 타지 않는다며 엄마 덕분에 강해졌다고 말한다.

 '저 혼자 자라게 해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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