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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패티 Aug 22. 2021

처럼, 시로 만나는 윤동주

화요일밤에 랜선으로 모여서 책읽는 사람들


윤동주 시 한두 편쯤은 암송할 줄 안다거나, ‘별 헤는 밤’이나 ‘서시’ 또는 ‘자화상’의 몇 구절 정도는 읊조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시도 시인도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걸 다시 확인한 시간이었다. 나의 책 읽기 악습일 수 있는 과몰입이 이 책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책의 앞 부분에 소개된 1930년대 전후 간도 지도에는 한반도에 ‘조선’이라는 이름이 분명하게 들어 있다. 그러나 19쪽 어느 때 누가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에는 간도와 조선이 사라지고 간도에는 ‘만주국’이, 한반도에는 ‘일본’이라고 표기된 지도가 나온다. 식민지 조국, 디아스포라와 같은 말들이 과몰입의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윤동주라는 이름 석 자가 지나치게 신비화되어 있다, 시를 제대로 읽지도 않으면서 역사의 희생물이라며 영웅시하는 이들도 있다”(10p)는 저자의 비판을 액면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내게는 윤동주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있는 게 사실이다. 젊어서 윤동주의 시는 연인 같더니 지금은 애틋한 자식의 말 같은 감성으로 시를 읽는다. 아무렇지도 않다가 윤동주의 ‘서시’나 ‘별 헤는 밤’을 만나면 반갑고 설렌다. 이번에야말로 객관적 거리 두기를 하면서 읽어보자고 했지만 어느새 나는 그 거리를 잊고 말았다.



“누군가의 시를 읽을 때 되도록 그 시를 썼던 시기에 쓰인 다른 시와 함께 이해하면 좋습니다. 시집을 만들 때 어느 시인이든 시의 흐름을 생각하면서 목차를 구성하기 때문입니다. 시집이 없다면 그 시가 탄생할 무렵 다른 시와 함께 보아야 할 것입니다. 가장 좋은 시 분석은 독자의 의식으로 재단하기보다는 시인의 시가 스스로 말하도록 시의 혼잣말을 경청하는 것입니다.”(268) 옳은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때문에 더 주관적 감상을 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가 시인이 아니더라도, 어떻게 그 시간들을 살아냈을까 생각만으로도 이미 절망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평범한 촌부였던 아버지로부터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삶을 들은 적 있다. 그때도 같은 생각을 했었다.



이 책에서 인상 깊게 본 것은 윤동주와 동시, 유동주의 사상과 맹자, 백석, 윤동주와 백석의 시, 정지용의 시 연관성을 짚어 본 부분이다. 윤동주 시인이 동시를 여러 편 썼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중 몇 편을 알뿐이었다. 110여 편의 시 중에 43편이 동시라고 한다. 기존에 알려진 시 외에 1998년부터 그의 시가 더 발굴되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도 ‘윤동주 정본’은 없다는 말은 좀 뜻밖이었다. 독서모임에서 ‘오줌싸개 지도’를 읽다가 어느 것이 맞는 것인가, 회원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집에서 시를 서로 비교해 보기도 했다.



윤동주는 정지용이 시나 백석 시에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백석은 불과 5살 연상의 시인이었는데, 그의 시집 <사슴>을 곁에 두고 여러 번 읽었다고 한다. 정지용의 시와 백석의 시에 영향을 받은 시들을 분석한 부분은 시인의 창작활동을 짐작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윤동주의 이 두 시인에 받은 영향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미메시스(mimesis)라고 했다. 미메시스란 작가의 의식이 녹아 있는 재현을 말한다.



윤동주의 사상과 맹자의 연관성을 설명한 부분은 또 다른 의외였다. 어릴 때부터 기독교적 가정에서 자라 교육을 받은 그가 맹자라니, 물론 저자는 호연지기와 측은지심이라는 맹자의 사상과 기독교의 융합이라고 ‘서시’를 설명은 했지만, 연결이 쉽지 않았다. 서시 1행에서 4행까지는 맹자의 호연지기의 상태라고 보았으며 특히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에서 ‘괴로워했다’라는 부분이 맹자의 ‘앙불괴어천’은 인용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338p)




    영화 '동주'에서



지난봄, 나는 같은 전시회를 보기 위해 두 번이나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았다. 전시는 1920~해방 직전 후까지 활동한 예술가의 작품을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라는 주제로 했다. 전시회에서 받은 인상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중 새삼스러운 것은 그 시대를 산 예술가들에게서 느낀 낭만이었다. 시대적 고뇌와 함께 그들은 사랑하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노래했으며,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물론 자살도. 1차 대전 후 파리에 모여서 예술 활동을 했던 예술가들을 일컬어 ‘에콜 드 파리’라 부르며 그들의 활동기를 19세기 마지막 예술 황금기였다고 한다. 그에 기대어 설명한다면 식민시대 조선 지식인들도 예술적 황금기를 보낸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 윤동주는 그들과 무엇이 다르기에 한 무리로 엮이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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