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밤에 랜선으로 모여 책읽는 사람들
“누가 되어도 우리네 삶을 다를 것 없네.” 5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공원 초입에 붙여놓은 공보물을 보면서 초로의 남자 둘이 대화한다. 그러나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고 시작하는 소설 <파친코>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운명에서 개인의 운명이 예외이기 어렵다고 말한다.
<파친코>는 1,2권을 합쳐 750여 쪽이나 되는 긴 소설로 조선이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1910년에서 해방 후 1989년까지 80여 년, 자이니치 4대의 삶이, 역사가 망쳐 놓았으나 상관없다는 한 문장에 응축되어 있다.
부모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자이니치 2세인 노아의 죽음은 당혹스러웠다. 노아의 죽음 이후 두 가지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죽을 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그래도 자기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 아닌가. 그리고 김현경의 책 <사람, 장소, 환대>에서 말한 성원권(成員權)권.
노아는 조선인 2세로 일본에서 나고 자라 와세다라는 명문대학에 진학했으나 마치지 못하고 자아니치라는 굴레를 벗지 못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학업을 돕는 이가 조선인이며 일본인들이 경멸하는 파친코로 돈을 버는 사람, 생부라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겨 스스로 학업을 중단하고 잠적한다. 그러나 가난한 부모, 파친코로 돈을 버는 조선인 부모로부터 탈피 혹은 독립하기 위해 구한 일자리가 다시 파친코라는 것은 지독한 아이러니다.
부모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해 못할 것도 없어 보인다.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사는 게 어떤 것인지를 잘 알기에 자신들보다는 나은 삶을 주고 싶었던 생부가 그의 학업을 지원하려 했다. 물론 노아가 생부의 의도대로 자이니치 한계를 넘어 살아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노아는 끝내 자살로 애끓는 생을 마감한다. 자기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인데 그래도 자기 구하기를 더했어야 하지 않을까. 노아를 이해는 하지만 이해한다고 용서가 되는 건 아니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한 점 나을 것 없을 것 같은 사람들, 양진, 선자, 경희는 살아내고 있지 않은가.
성원권이란 그가 속한 사회 안에서 자기 자리를 갖는 권리를 말한다. 존재를 인정받는 것이며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뜻이다. 이들에게 일본이라는 사회에 성원권이 없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자이니치 1세의 경우 다시 돌아가지 못해도 그리워할 수 있는 고향, 모국이 있다는 게 살아가는데 의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자이니치 2세, 3세는 상상으로도 그리워할 고향도 모국도 없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더 심하게 정체성 혼란을 겪는 것이 아닌가 싶다. 기어이 꺾이고 만 노아의 갈등은 애달프기 짝이 없다.
한편 책 전편에 흐르는 일본인의 한국인에 대한 학대와 차별, 구체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았으나 위안부 문제 등이 노골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일본인들에게는 <파친코>가 썩 기분 좋은 내용의 소설은 아닐 것 같다. 한국인인 내게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일제의 속국이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그렇지만 그보다 글 저변에 흐르는 깨끗하고 예의 바른 일본인이라는 표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럽고 무례한 한국인으로 그려진 이미지가 그렇다.
뒷골목에서 예의는 사치다. 자이니치들은 조선인이어서 올바른 직장을 구하기도 어렵고, 지역사회에서 성원권을 얻지도 못한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삶에서 예의와 청결을 구하는 것은 이상일 뿐이다. 자이니치의 삶이 고단한 데 일본인이 완전히 무관하다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자이니치를 대하는 일본인은 다분히 예의 바른 나쁜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2021년을 사는 우리 자신이 이 땅에 이주해와 살고 있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게 예의 바른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도 말 못하겠다.
짧은 글 한 편을 쓰는 내내 자이니치, 조선인, 한국인 세 단어 앞에서 머뭇거렸다. 그게 마치 어디에도 확실히 속하지 못하는 이들 앞에 놓인 운명 혹은 그들이 처한 사회적 위상인 것만 같아 딱하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가 만들어낸 혼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