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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패티 Oct 06. 2021

단풍 객잔

화요일 밤 랜선 독서모임

단풍객잔/김명리/소명출판



 

‘단풍’, ‘객잔’이라는 말을 써 놓고 보니 ‘가을산’, ‘가을강’, ‘가을볕’, ‘가을저녁’ 그리고 ‘객창’, ‘나그네’, ‘객지’ …. 조락의 말들이 줄줄이 불려나옵니다. 물론 아주 주관적인 연상입니다. ‘단풍 객잔’에서 풍기는 가을 정취 때문일 겁니다. ‘단풍 객잔’이라니! 이보다 더 서정적인 제목을 가진 수필을 나는 이 가을 발견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가을에는 서정성 풍부한 수필이 읽고 싶어집니다.



한편으로는 ‘단풍 객잔’에서 ‘강호의 꿈을 품은 사내들이 날이 저물어 객잔에 묵다 우연히 전설의 협객을 만나, 강호의 꿈과는 먼 부질없는 사건에 휘말리면서….’ 이런 스토리를 품은 장만옥이 나오고 양가휘도 나왔던 홍콩영화도 생각납니다. ‘단풍 객잔’ 단어 하나로 불려 나온 지나간 시간들이 밤길을 달리는 마차의 등불처럼 흔들립니다. ‘객잔’이라는 말에 아마 내 안의 기억들이 공명했던 것 같습니다. ‘객잔’에는 객창감이 넘칩니다. 


책을 펼치면 시인이 보낸 초대장이 있습니다.



단풍 객잔으로의 초대     


"정극인은 상춘곡에서 ‘화풍이 건 듯 부러 녹수를 건너오니,

청향은 잔에 지고 홍진은 옷에 진다’고 노래했다.      


한순간 머물렀다 떠나는 가을잎 잎잎 속에는 저마다

호젓하고 저마다의 반짝이는 객점이 있으려니     


청행낙홍 천만 사(絲)가 가고 오고 오고 또 가는 무정세월이여   

  

단풍잎 객잔 속에 온갖 시름 부려놓으시라.

한바탕 영롱하게 쉬어가시라.         

  



초대장에 이어서 부려놓은 작가의 말들, ‘저녁녘 산그늘’, ‘청렬한 문장’, ‘가을 낙조’, ‘창연한 생각’에 이끌려 나는 이미 단풍 객잔에 여장을 푼 듯했어요. 해가 설핏 기울기 시작한 가을 저녁 무렵이었지만 그대로 단풍 객잔으로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시인은 경기도 남양주 송라산 기슭에 산다고 해요. 지도를 펼쳐보니 수종사, 보광사 같은 고찰이 있고, 북한강으로 흘러드는 구운천이 있는 곳입니다. 봄, 여름을 건너 가을에 당도한 나무들은 할 말이 많아 잎잎을 붉은 색으로 물들이는 곳. 그곳, 시인의 처소가 단풍 객잔이 아닐까요. 때마침 ‘단풍 객잔’의 계절입니다.     


     


집 근처 산책길에서 만났던 빈집.

    

무너진 담벼락, 폐허를 타고 오르는 홍황紅黃의 단풍 빛이 사람의 비애조차 궁륭으로 만드는 듯했으니 잡풀 무성한 빈집의 마당에 누군들 햇곡식 말리고 싶지 않았으랴.     


더 깊이 들어가 되돌아 나올 수 없는 폐허면 어떤가. 낮고도 잠잠해, 귀 기울이면 해금소리 한 자락 울려 퍼지는 왁자한 폐허.

-‘저 단풍 빛’(142)      



홍황의 단풍이 타오르는 담벼락 아래 쏟아지는 가을 볕, 그 볕에 말라가는 곡식, 곡식 옆에는 애호박이며 가지며 고춧잎도 같이 말라갑니다. 무너진 담벼락, 비애, 빈집, 폐허 위로 흐르는 적요조차 왁자한 것은 알알한 가을, 가을볕 쏟아지는 소리겠지요? 홍황홍황(紅黃紅黃)으로 잎잎이 물드는 소리겠지요?



348쪽을 1부에서 9부까지 아홉 개로 나누어 쓴 글. 글은 꼭지마다 길지 않고, 문장 또한 시처럼 짧고 시처럼 예민해서, 어떤 때는 잘 여문 곡식 알처럼 또롱또롱하고 또 어떤 때는 빈 공간을 건너는 바람처럼 느낌조차 고요합니다. 표지 사진부터 책 속 사진들은 작가가 직접 찍은 거라는데요, 사진을 찍는 이의 마음이 앵글에 잡혔습니다. 책을 읽는 사나흘, 단풍 객잔 초대받은 손님처럼 지냈습니다. 


   

세상사에 상처받을 일도, 받을 것도 없으면서 괜시리 서러운 것 같은 날들이 흘러갑니다. 오는 주말에는 뒷산에라도 다녀와야겠습니다. ‘나만의 객점’에 들러 그곳이 단풍 객잔인양 마음의 짐을 풀고, 한나절 가을 볕 속에 앉아 단풍에 물들어 봐야겠습니다.     


감흥이 크면 할 말은 짧아집니다. 


때마침 종종 페북에서 소식을 보는 한 페친의 페북에는, 떠나온 지 오래 돼 꼬리표를 잃어버린 듯한 출처 미상의 ‘막걸리 순위’표가 올랐습니다. 자기 좋아하는 막걸리가 빠졌으니 이 표는 ‘나가리’라고 쓴 댓글에 ‘좋아요’ 하나 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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