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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패티 Jan 24. 2022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은

쓸데없이 진지한 일기 2


한 소녀가 어른이 되면 아주 먼 곳에 가 보겠다고, 그리고 할머니가 되면 바닷가에 와서 살 거라고 할아버지에게 말합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아주 좋은 생각이라며 해야 할 일 한 가지를 들려줍니다. 바로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라고. 어떻게 하는 건지 알지 못했지만 자라면서 잊은 적이 없었지요. 성장해서 노인이 될 때까지 소녀는 자신의 꿈을 잊지 않고 이루기 위해 노력합니다.




마침내 어릴 적 꾼 꿈대로 바닷가로 돌아와 살지요. 하지만 아직 하지 못한 일,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만은 하지 못할 것 같았지요. 여기저기 몸이 아픈 늙은 몸으로 침대에 누워 밖을 보다 창가에 저 홀로 핀 루핀 꽃을 봅니다. 꽃에서 위안을 얻은, 앨리스에서 미스 럼피우스로 이제 루핀 부인으로 불리는 소녀는 꽃씨를 세상에 뿌리기로 합니다. 그 일이 아직 세상을 아름답게 할 수 있는 일인 줄은 모르지만요. 꽃씨를 주문해서 산책할 때마다 여기저기 뿌립니다. 바닷가에도 교회 마당에도 언덕길에도---.




이듬해 봄이 오자 여기저기 루핀 꽃이 피어납니다. 이후부터는 뿌리지 않아도 저 홀로 피어나고, 꽃씨를 뿌리지 않은 곳에서도 루핀 꽃이 피어나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에 작지만 일조하게 됩니다. 그림책 <미스 럼피우스> 이야기입니다.



사진:픽사베이(라벤더)




전근을 가게 되면서 정들었던 사람들과 그대로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모임을 만든 사람이 있어요. 그는 일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만나서 식사하고 차담을 나누는 것도 좋지만 기왕이면 목적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해서 독서모임을 만듭니다. 첫해는 기관의 도서구입에 관한 지원도 받고 독후감도 열심히 쓰고 예정대로 모임이 순조롭게 흘러갔지요.




이듬해는 사정이 조금 달라집니다. 맡은 일이 많아지고 밖으로는 코로나 감염병이 극성을 부리면서 모임을 여는 일 자체가 어렵게 됩니다. 어려워진 여건을 지나는 방법으로 대면 만남 대신 화상 미팅으로 바꾸고, 글쓰기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회원들을 위해 독후감은 자유롭게 하자는 제안도 합니다. 카페 중심으로 독후감을 올리고 댓글을 다는 방식으로 부족한 대면 모임을 보완해 왔는데, 이제 그 일마저 소원해지기 시작합니다.




일 년 내내 정말 다양한 일을 해내던 그는 연말쯤에는 신체적으로 누적된 피로가 정신적 피로로 이어지면서 깊은 몸살을 여러 날 앓기도 한 것 같아요. 운영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늘 있었고, 책을 고르는 일도 쉽지 않았다고 해요. 다양한 연령층에 선호하는 분야도 다른 회원들을 고려해서 책을 고르는 일을 간단하게 하기도 어렵지요. 기운을 차리고 몸을 추스르면서 새해에는 자신을 돌보는 일에 좀 더 공을 들여야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흔드는 뜻밖의 일이 생깁니다. 독후감을 쓰지 않아도 된다, 편안하게 하자는 제안에 모두들 환호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 조용히 꾸준히 글을 쓰고 카페에 글을 올리는 회원이 있었던 거지요. 한편 위안도 되었지요. 누군가 카페를 드나들며 글을 올리고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요. 비록 처음처럼 열정적으로 운영을 돌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야말로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카페였더라면 모임을 그만두는 결정은 쉬울지 모르지만 다른 종류의 허전함이 있었을 테지요.






모임을 접어야겠다 먹은 마음을 번복하게 하는 일이 생깁니다. 회원 중 한 사람이 다른 이야기 끝에 ‘올해 활동했던 것 중 가장 좋았던 모임이 우리 독서 모임’이었다는 회원의 말을 듣게 된 거지요.


그렇게 말한 회원은 실은 드러나게 열정적으로 활동한 사람이 아니어서 더 당황합니다. 마음이 더 크게 흔들리는 일은 거듭 일어납니다. 덕분에 책 읽는 습관이 생겼다, 올해도 계속하겠다고 하면서 쓴 글을 보내온 겁니다.





앨리스는 자라는 동안 세상을 아름답게 하라는 할아버지 말씀을 잊은 적도 많았습니다. 힘들고 지쳐서 무력감에 빠질 것 같을 때마다 누군가 그에게 의미 있는 말을 해줍니다. 해주었다기보다는 그들의 말에서 앨리스가 의미를 찾았다고 봐야겠지요. 온 마을에 루핀 꽃이 아름답게 핀 것은 힘없이 누워 바다를 바라보던 앨리스의 눈에 띈 루핀 꽃 몇 송이에서 시작됩니다. 이제 더는 꽃씨를 뿌리지 않아도 해마다 봄이 오면 마을 여기저기 더 많은 곳에서 루핀 꽃은 피어납니다.





알 수 없습니다. 그의 독서모임이 얼마나 갈지, 그 모임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유용한 것이 될지. 그러나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루피 부인이 생각났습니다. 몇 송이 루핀 꽃으로 시작된 루핀 꽃밭, 눈치채지 못했지만 오랜 시간 루핀 부인 마음속에서 자리 잡고 있었던 생각이 꽃으로 피어난 것처럼. 그의 독서모임도 어디선가 누구에게로 인가 이어지다 모르는 곳에서 또 꽃을 피우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시작했을 때의 의욕이 사라지고 번거롭고 귀찮을 수도 있는 일이 되었지만, 그런데 그 일이 몇몇 회원들에게로 가서 스스로 피는 꽃이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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