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인사
한 번의 짧은 삶, 두 개의 육신
작별인사 | 김영하
"자작나무숲에 누워 나의 두 눈은 검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한 번의 짧은 삶, 두 개의 육신이 있었다. 지금 그 두 번째 육신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 어쩌면 의식까지도 함께 소멸할 것이다. 내가 겪은 모든 일이 머릿속에서 폭죽 터지듯 떠오르기 시작한다. 한때 회상은 나의 일상이었다. 순수한 의식으로만 존재하던 시절, 나는 나와 관련된 기록들을 찾아다녔다. 그때마다 이야기는 직박구리가 죽어 있던 그날 아침, 모든 것이 흔들리던 순간에서 시작됐다."
한동안 소설 읽기에 시들했다. 이전이라고 소설을 열심히 읽지도 않았지만. 내 나이로는 남들이 쓴 소설보다 온전한 나 자신으로만 살아가기도 벅차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냥 소설이 손이 잡히지 않아서 이기도 하다. 그럴 때 보내온 소설 한 권, 김영하의 <작별 인사>는 단숨에 읽혔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머리말처럼 쓴 글이 이해되었다. 읽고 나서 보니 짧은 이 글이 소설의 줄거리였고, 스포였다. 작가가 스스로 스포일러인 셈이다.
철이라는 소년이 있다. 자상한 아버지와 철학자의 이름을 붙인 고양이 3마리와 함께 평양에 산다. 배경은 통일 대한민국이고 시간은 미래다. 얼마큼의 미래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소설 속 평양의 한 구역, 쾌적한 '휴먼매티스'에서 나서 자라는 아이, 철이가 주인공이다.
엄마의 자궁에서 태어나지 않는 아이. 실제 그런 탄생이 가능한지 알 수 없다. 실험 중인 생명들이 있으니 사람도 그렇게 태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아무튼 철이는 기계 인간이었다. 몸은 망가질 수 있지만 죽지 않을 수 있다. 사람의 몸을 가질 수도 있고 고양이 몸을 가질 수도 있다. 몸을 갖지 않을 수도 있다.
몸이 없다는 것, 누군가는 몸에 갇혀 사는 게 고통이라고 하더라만, 몸이 없이 의식만 있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철이를 통해 작가는 참 잘 묘사해 놓았다.
"막상 몸이 사라지고 나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몸으로 해왔는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몸 없이는 감정 다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볼에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이 없고, 붉게 물든 장엄한 저녁노을도 볼 수가 없고, 손에 와닿는 부드러운 고양이 털의 촉감도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동이 트지 않은 휴먼매터스 캠퍼스 산책로를 달리던 상쾌한 아침들을 생각했다. 몸이 지칠 때 나의 정신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팔과 다리가 쉴 새 없이 움직일 때, 비로소 생각들을 멈출 수 있었다는 것을 몸이 없어지고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242)
"몸으로부터 갑자기 분리된 나의 뇌에는 여전히 예전의 신체 부위와 연결된 신경들이 남아 있었고, 이 신경들은 하루 종일 신체 부위로부터 오는 온갖 신호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아무 신호도 들어오지 않는 무시무시한 고요가 찾아오자 이 신경들은 신호를 상상해 내기 시작했다.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는 방에 사람을 두면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는 실험도 있었다. 바로 그런 것이다. 외부로부터 아무 자극도 없는 상태라는 것은. 나는 다리가 가렵다고 느끼지만 다리가 없다는 것 열시 잘 알고 있다. 거꾸로 말하면 다리가 없다는 것을 아는데도 다리가 가려운 것이다. 없다는 것을 알지만 긁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나는 차라리 뇌 기능을 정지시켜달라고 아빠에게 부탁했다." (248~249)
그러다 아빠가 철이의 뇌를 고양이 데카르트에 이식한다. 아빠가 휴먼매티스에서 쫓겨날 때 그렇게 했다. 삶은 모두 기록되고 사라지지 않는다. 클라우드에 영원히 머문다. 어떤 권능도 기술도 이 모든 것을 일거에 삭제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의 삶은 21세기를 종말로 증발해 버리지만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어딘가에 구름처럼 피어 있게 된다.
" 팔을 움직여 보고 고개를 돌려보았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이 날것의 감각이 새삼스러웠다. 따뜻한 것을 만지만 안온함이 마음을 데웠고, 세원한 바람이 얼굴을 핥고 지나가면 상쾌했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갈 때의 짜릿함은 물론이고 단단한 것에 몸이 부딪힐 때의 아픔까지도 반가웠다." (276)
몸이 없으니 생각한 것을 실행할 수 없다. 생각은 생각으로 끝나고, 그만두는 것조차 생각으로 이어졌다. 몸이 없으니 잠을 잘 수 없다. 스물네 시간 자지 않고 각성한 채로 있는다는 게 어떤 고통인지를 철이는 생각한다. 생각하며 느낀다.
"생의 유한성이라는 배음이 깔려 있지 않다면 감동도 감흥도 없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이 한 번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는 모든 것이 절실했던 것이다." (276)
누구라도 일희일비하며 산다. 아옹다옹산다고도 말한다. 소설은 몸을 가진 인간이기에. 괴로움도 슬픔도, 기쁨도, 즐거움도, 감동과 분노, 환희와 비애, 성취감과 좌절감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감.감.감들---, 모든 '감'들이 몸을 가진 유한한 인간이기에 누.리.는 것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안온한 공간 휴먼매티스에서 살던 철이가 휴먼매티스 바깥 세계를 경험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 <작별 인사>는 끝이 눈물 나지만 복잡하고 무겁고 거칠고 상스러운 것들을 모두 내려놓은 것 같아 작별 인사라는 말이 새삼 평안하다.
시베리아 어디쯤 써 마지막 인간 '선이' 마저 죽고 선이가 만든 공동체가 해체된 후, 공동체가 머물렀던 공간에 인간을 닮은 존재로는 철이 혼자 남는다. 그가 마지막에 자연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차차리 평화롭다. 평화로운데 눈물이 났다.
"끝이 오면 너도 나도 그게 끝이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을 거야."
철이는 끝이 온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받아들인다. 짧게 영생할 수 있는 버튼을 누르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만. 그 유혹조차 휴먼매티스가 애초에 프로그래밍해 놓은 충동이다. 그 충동은 논리도 설명도 없이 몰아붙인다. 철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이 온당한지 생각하며 육신이 없는 텅 빈 의식으로 살아가다가 결국 기계지능의 일부로 통합되는 미래. 자아가 사라진 삶이란 게 죽음과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다시 소설 처음으로 돌아가 본다. 곰에게 망가진 육신으로 누워서 끝을 받아들이는 철이가 보인다.
"자작나무숲에 누워 나의 두 눈은 검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한 번의 짧은 삶, 두 개의 육신이 있었다. 지금 그 두 번째 육신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 어쩌면 의식까지도 함께 소멸할 것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철학적인 소설이라고 소개한다. 물론 그런 점들을 생각해보게 한다. 그런 것들보다 나는 <작별>이라는 말에 꽂혔다. 내내.
덧/
"천지현황 天地玄黃, 우주홍황 宇宙洪荒"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며, 우주는 넓고 거칠다'라는 이 말은 천자문 첫 구절에 들어 있다. 내가 사는 층위에서는 몰라도 사는데 큰 지장이 없는 글자들이었다. 어릴 때 외우면서 그 뜻이 궁금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다시 그 글자를 앞에 두고, 나는 그 뜻보다 과학이 오늘날 같지 않던 그 옛날 중국 사람들이 천지는 현황하고 우주가 홍황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를 궁금해한다. 나는 아직도 유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