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헷세 '싯다르타'를 읽고
자아찾기로 시작된 여정이 끝나갈
무렵 싯다르타는
뱃사공 바수바데가 떠난 자리에 남는다.
함께 고행을 떠났던 고빈다와 길이 갈린 그 강이다.
윤회인가?
거기서 고빈다를 다시 만난 것은?
싯다르타와 고빈다의 출가 동기는 같았으나
과정에는 차이가 있었다.
싯다르타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스스로 터득해 갔다면
고빈다는 일관되게 부처의 가르침을 따른다.
소설 말미에 이르러 싯다르타는
궁극적인 깨달음과 내면의 평화를 얻었고,
고빈다도 그의 방식으로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나 싯다르타를 만난 고빈다는
싯다르타의 변화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이 세계는 불완전한 것도 아니며,
완성을 향해 서서히 나아가는
도중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세계는 매 순간순간 완성된 상태에 있으며,
온갖 죄업은 이미 그 자체 내에
자비를 지니고 있으며,
작은 어린애들은 모두 자기 내면에
이미 백발노인을 지니고 있으며,
젖먹이도 모두 자기 내면에
죽음을 지니고 있으며,
죽어가는 사람도
모두 자기 내면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다."
(208p/민음사, 2016)
“한 개의 돌멩이네.
이 돌멩이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아마도 흙이 될 것이며,
그 흙에서는 식물,
아니면 짐승이나 사람이 생겨나게 될 거야.
예전 같았으면 이럴 때
‘이 돌멩이는 단지 한 개의 돌멩이일 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했을 것이네)
(---)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순환적인 변화를 꺼리는 가운데
인간이 될 수도 있고
정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그것이 언젠가는
이런 것 저런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고 항상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211p/민음사, 2016)
이 대화는 수행의 길 끝에 만난
고빈다와 싯다르타가 나눈 대화다.
고빈다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싯다르타의 깨달음으로 보인다.
싯다르타의 생각을 내 방식대로 해석해 본다.
▶모든 존재는 이미 완전하며,
그 자체로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
변화는 필연적이지만, 현재의 상태도 완벽하다.
▶진정한 깨달음은
외부의 가르침이나 규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생명과 사물은
각자의 존재 의미가 있으니
그 자체로 존중받고 존중해야 한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하수는 고행을 떠나고 고수는 고향에 남는다고 한다.
수행을 하는 사람의 자세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이다.
진리는 우리 주변 어디에나 존재하며,
우리 안에도 깃들어 있다.
다만 우리가 진리를 찾기 위해 너무 멀리,
혹은 어려운 곳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을 뿐이다.
세상도처유상수世上到處有上手
인생이 학교다.
그러나 볼 수 있는 사람만 보고
들을 수 있는 사람만 듣는다.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나도 얻기는 쉽지 않은 법,
그래도 한 가지,
더 잘 살기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말 일이며,
또한 ‘이번 생은 망했다’는 말도 옳지 않다.
‘나는 내가 짓는 것으로,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만든 것이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가 만들 것’이므로
내 속도로 꾸준히 나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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