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의 꿈
데니스 존슨의 중편 소설 <기차의 꿈>은 20세기 초 미국 서부의 거친 풍경을 배경으로, 한 남자의 일생을 그린다. 이 소설로 내게는 영화가 만들어 준 서부 개척의 성공 신화가 깨진다. 카우보이의 영웅담 대신 협곡의 허공에 아슬아슬하게 나무 다리를 이어 붙이는 노동자들의 고단한 땀과 숨, 중국인 노동자로 대변되는 인종차별의 그늘, 그리고 인간이 결코 개척이라는 미명으로 정복할 수 없는 자연의 냉엄함이 그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내 겹쳐지는 인물은 클레어 키건의 <이토록 사소한 것들> 속 주인공 빌 펄롱이다. 두 사람은 닮아 있다. 20세기 초 아이다호의 숲에서 철길을 놓았던 로버트 그레이니어나, 1980년대 아일랜드에서 석탄을 나르던 빌 펄롱이나 생존조차 어렵던 시대, 노동으로 자기 삶을 증명하는 노동자들이다. 가난하지만 소중한 가정을 꾸리고 그 평온한 일상을 지키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두 사람은 선택이 갈라진다. 빌 펄롱이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아니요’라고 말하며 문을 열고 나가는 ‘용기 있는 선택’을 했다면, 그레이니어는 혹독한 재난과 상실 앞에서 문을 닫고 침묵과 고독의 길로 침잠한다. 이 차이는 아마도 ‘지켜야 할 존재’의 유무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빌 펄롱에게는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와 다섯 명의 딸이라는 실재하는 사랑이 있었기에 불의에 맞설 동력을 얻었지만, 그레이니어는 거대한 산불로 인해 아내 글래디스와 딸 케이트를 속수무책으로 잃어버렸다. 지켜야 할 모든 것을 불길 속에 떠나보낸 사내에게 남은 것은, 자신을 덮친 가혹한 운명을 거스르지 않고 홀로 견뎌내는 일뿐이었다.
고독하고 투박한 남자를 그렸지만 소설은 아름답다. 지독한 고독마저도 서정적으로 묘사한다. 가족을 잃은 뒤 홀로 남겨진 그레이니어의 밤을 묘사한 장면, 즉 “처음에 유령은 흔들리는 빛처럼 꺼지기 직전인 촛불처럼 보일 뿐이었지만 곧 여자의 형상을 갖췄다. 희미하게 반짝이는 그녀의 빛이 흔들렸다. 그녀의 주위에서는 그림자들이 가늘게 떨렸다.”라는 대목은 상실의 슬픔이 어떻게 한 인간의 삶을 신화적인 영역으로 끌어올리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증기 엔진의 굉음 속에서 “길을 오가는 말들은 마치 침묵 속에서 거대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증기 소리와 기계 소리에 그들이 내는 소리가 모두 지워진 탓이었다.”라는 묘사는 문명의 소란 속에 지워져 버린 인간의 고립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제목을 <기차의 꿈>이라고 붙인 데에서 중의적이고도 깊은 상징적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기차'는 소설 속에서 문명과 개인, 그리고 삶의 덧없음을 잇는 핵심적인 가교 역할을 한다. '기차'는 산을 뚫고 협곡을 가로지르며 자연을 정복해 나가는 인간의 의지와 산업화의 진보를 상징하는 거대한 괴물과 같다. 하지만 그 화려한 '진보의 꿈' 이면에는 그레이니어와 같은 이름 없는 노동자들의 고된 삶과 희생이 깔려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꿈'은 그레이니어의 일생이 마치 한 편의 환상이나 찰나처럼 지나갔음을 의미한다. 그가 누렸던 짧은 행복은 산불과 함께 연기처럼 사라졌고, 그 이후의 삶은 아내의 유령을 만나고 늑대 소녀를 마주하는 등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상태로 지속된다. 그레이니어는 늙어 가면서 오두막에서 기차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고, 꿈속에서 기차를 탄다. 멀리서 들려오는 차가운 철강의 경적 소리는 고독한 노인의 머릿속에서 아련한 기억과 슬픈 '꿈'으로 교차된다. 소설은 한 인간의 일생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얼마나 미약하고 몽환적인가, 인생을 관통하는 근원적인 것은 허무라고 말한다. 읽는 내내 나는 그레이니어의 고독에 몸서리를 쳤다.
고독한 인간 그레이니어. 누구나 삶의 어느 순간, 지켜야 할 무언가를 잃거나 거대한 운명의 흐름 앞에 무력해졌을 때 그 길은 황량하고, 길 위에 선 자는 고독하다. 그레이니어의 고독은 단순히 외로운 상태가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을 잃고서도 여전히 삶을 지속해야만 인내의 시간이다. 더 이상 지킬 것이 없기에 선택한 그의 침묵은, 삶의 허무와 슬픔을 온몸으로 통과해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몸짓이다.(모든 것을 잃고 침묵으로 들어간 남자는 <나무를 심은 사람>의 엘제아르 부피에도 있구나.)
결국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고독한 오두막을 짓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지켜야 할 것이 있었기에 용감했던 펄롱과, 지켜야 할 모든 것을 잃었기에 고독을 수용한 그레이니어. 방식은 달랐으나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 했던 그들의 뒷모습은 동일한 무게로 남는다. 소설의 마지막, 기차의 경적 소리가 늑대의 울음소리라는 원초적인 자연의 소리 속으로 흡수되는 장면은 서부 개척 신화의 진정한 종언을 알린다.
1960년대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가 흐르는 시대까지 살아남아 자연으로 돌아간 그레이니어의 일생은, 인간이 정복하려 했던 거창한 야망도 처절한 고독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모두 희미해지는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 고독마저도 삶의 거룩한 일부임을 우리에게 나지막이 속삭여준다.
덧/
지난해 넷플릭스에서 영화로 보고 원작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영화보다 소설이 낫다. 이미 번역 출간된 책인데 출판사를 바꿔 새로 출간되었다. 140쪽 분량의 중단편 편소설. 작가 데니스 존슨은 <대성당>으로 소설 읽는 이들이 잘 아는 레이먼드 카버의 수업을 들으며 문학 공부를 했다고 한다. 데니스 존슨을 일컬어 '작가들의 작가'로 추앙받는다고 한다. 이 책 <기차의 꿈>은 2002년 미국의 문예지 <파리 리뷰>에서 처음 발표되었고, 같은 해 아가칸상, 이듬해 오헨리상을 수상하는 등 수상 이력도 화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