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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패티 Mar 06. 2019

나혼자 자라겠어요

그림책에 물들다 | 천하무적 고무동력기

천하무적 고무동력기 |    김동수 외 , 박혜준 지음   | 보림



아무도 없네, 혼자 보내는 시간    

이제 막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있습니다. 초인종을 눌러봅니다.  '아무도 없네.' 아무도 없을 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가 확실하게 실망으로 바뀔 때 아이의 머리 위에선 주룩주룩 비가 내립니다.  그래도 손에 '고무동력기'가 있어 안심이에요. 이걸 만들면서 엄마를 기다릴 생각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 집이 서운하기는 해요.   '엄마는 오늘도 늦게 오시나? 누가 도와주면 좋을 텐데. 에이, 설명서 보고 만들면 되겠지 뭐. 해 보자.' 무지무지 어렵겠지만 아이는 스스로 만들어보기로 합니다.


   <천하무적 고무동력기>는 이런저런 이유로 혼자 놀아야 하는 도시 아이들의 보편적인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 그림책을 읽은 어린이 독자들은 주인공에게 쉽게 감정이입을 한다고 하는데요, 이 아이한테서 도시 아이로 사는 아이들이 자신과 닮은 처지를 느꼈기 때문일 겁니다. 감정이 이입되기는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하는 엄마 아빠를 둔 아이들의 겪는 외로움의 시간이 충분히 짐작 되기 때문이에요. 상상은 했지만 막상 그림책 속 아이의 모습이 내 아이 모습같아서지요.


 초등학생이지만 아직 낮은 학년인 것 같은 소년, 일을 하는 엄마는 오늘도 늦고, 오후의 몇 시간을 혼자 보내야 하는 아이라는 설정이 무척 현실적입니다. 이야기 내내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도 특정한 주인공이겪는 일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을 많은 아이의 일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림 전체가 명랑만화 같고 마치 아이들이 그림을 그린 것 같아요. 어린 독자들은 이런 그림을 더 좋아한다고 합니다. 낯설지 않고 자기가 잘 아는 친구 누군가의 그림 같아서 일 수도 있을 거예요.  

 화면 또한 무질서하게 활용하여 글과 그림을 읽는 순서가 자유롭습니다. 말풍선을 먼저 읽어도 되고 그림을 먼저 읽어도 됩니다. 마치 두서 없이 생각나는 대로 그린 아이들 그림 같아 더 친근합니다. 



날아라, 고무동력기 !    


 이 작품은 형식적으로 현실-판타지-현실의 구조를 통해 혼자 노는 아이의 시간을 보여줍니다. 이야기의 서사는 현실의 아이가 고무동력기를 만들어 상상에서 놀다가 현실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많은 장면을 판타지로 채우고 있는데 그 시간이야말로 아이가 엄마를 기다리며 보내는 시간의 맨얼굴입니다.


'상상력은 아이를 살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엄마를 기다리는 긴 시간 상상력이 없다면 아이는 무엇으로 그 시간을 채울 수 있을까요.  아이들이 하는 많은 놀이들이 판타지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만큼 현실과 상상의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아이들의 힘이라고 봅니다. 


 상상 속에서 아이는 고무동력기를 타고 한강을 날고 오리 배를 끌고 물귀신을 만납니다. 놀이동산으로 탈출하고 숨을 돌리지만 귀신들이 벌써 코끼리 열차를 타고 쫓아왔습니다. 언젠가 엄마랑 아빠랑 함께 가서 신나게 놀았던 놀이동산의 갖가지 놀이기구가 변신을 합니다. 회전열차는 행성이 되고 청룡열차는 은하특급 999가 됩니다. 아이는 끈질기게 쫓아온 귀신들을 잡고 드디어 천하무적 고무동력기 조종사가 되었습니다.  


 역시 상상 속에서 고무동력기는 이야기 상대가 되기도 합니다. 코끼리 아줌마를 만나 장난을 치면서 마치 친구에게 말하듯이 고무동력기와 대화를 나누지요. 


 상상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지점은 아이가 아줌마 코끼리 코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입니다. 뜻밖에도 엄마 코 위에 아기 코끼리가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이는 무릎을 세운 채 그 모습을 바라봅니다.  “나도 그만 가야겠다.”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는 아기 코끼리와 엄마 코끼리가 행복해 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순간 문득 엄마가 없다는 현실을 깨닫게 된 것일까요? 그러나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아이는 씩씩합니다. 한바탕 고무동력기를 친구 삼아 논 기운으로 엄마가 올 때까지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혼자 있는 아이가 느끼는 무서움이 귀신을 불러내고, 엄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아기 코끼리와 엄마 코끼리로 나타난 듯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상상의 세계가 오늘도 혼자서 집에 있어야 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대신 보여주고 나아가 위로해 주는 힘을 갖는 것이 문학의 힘이겠지요. 또한 미처 상상의 세계를 만들 줄 모르는 아이들을 위해 작가가 그 세계를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어린이 문학에서 놀이-도구로서 문학이 가능하려면 후자의 몫이 더 커져야 한다고 봅니다.      



나 혼자서 자라겠어요    

 

아이의 바람은 오직 하나입니다. 엄마가 빨리 오는 것, 그래서 엄마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도움 없이도 고무동력기를 잘 만들었고, 엄마 없는 시간을 잘 놀게 해주었으니 고무동력기는 머리 위에 이고 모셔야 할 정도입니다. 못하는 놀이가 없어서 고무동력기는 천하무적이지요. 귀신도 물리치고 무엇보다 혼자 보내야 하는 시간을 이겨내게 했으니 이것이야 말로 천하무적이라 할 만합니다. 


 앞 면지의 고무동력기와 아이 사이의 빈 공간이 뒷면지에서는 놀이기구로 이어져 있어요. 그건 아이가 만들어낸 이야기이고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아이가 한 놀이의 전부라고 생각해도 되겠지요. 오늘 하루 들여다본 아이의 생활은 내일도 계속될 거예요. 그건 일하는 엄마를 둔 평범한 아이의 일상입니다. 


 고무동력기는 판타지 속에서는 천하무적이었는지 몰라도 현실에서는 단 1초밖에 못 날았다는 사실은 뒷 표지에 실린 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그러나 아이는 그 원인을 알고 내일은 다른 방법으로 시험해 보리라 다짐합니다. 할 일도 생겼으니 내일도 잘 견딜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이 책에서는 아이 이야기가 다 끝나도 엄마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일기를 쓸 때는 엄마가 돌아왔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야기 속에서 아이는 혼자 노는 시간을 뭔가를 만들고 즐기면서 잘 지냅니다. 현실의 아이가 이렇게 엄마 없는 시간을 보낸다면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하는 엄마 마음이 조금은 놓일 것도 같습니다. 


 오래전 교사 임길택은 현실의 아이들이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강할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아이들이 어려운 사정이 있더라도 힘껏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 아이들의 모습과 자기의 바람을 글로 썼지요. 


길러지는 것은 신비하지 않아요 /소나 돼지나 염소나 닭/모두 시시해요/그러나, 다람쥐는/볼수록 신기해요/어디서 죽는 줄 모르는/하늘의 새/바라볼수록 신기해요/길러지는 것은/아무리 덩치가 커도/볼 품 없어요/나는/아무도 나를/기르지 못하게 하겠어요/나는 나 혼자서 자라겠어요 

(임길택, 「나 혼자서 자라겠어요」 전문, <나 혼자서 자라겠어요>, 창비)   

 

 자연 속에서 제 나름대로 살고 죽는 다람쥐나 새는 가축과 다릅니다. 누군가에게 사육당하는 삶을 거부하고 주체로서 자기 삶을 살아가겠다는 시적 자아의 다짐이 아주 당찹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삶이 더 고달파진다 해도 제 몫의 삶을 감당하는 아이로 자라기를 바라는 시인의 마음이 이 책을 읽고 난 저의 마음입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이태준 글, 김동성 그림 <엄마마중>소년한길

모리 요코 <혼자 집 보는 날> (북스토리아이)

이와사키 치히로 <비 오는 날 집보기>(미디어창비)

사라 스튜어트 글, 데이비드 스몰 그림 <리디아의 정원>(시공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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