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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패티 Mar 09. 2019

우리가 키우고 싶고 보고 싶은 어린이

 그림책에 물들다 | 영이의 비닐우산

영이의 비닐우산 |  윤동재 글 | 김재홍 그림                         
빗속의 할아버지    

 몇 해 전, 버스정거장에서 좌판을 펼치고 씨앗을 팔던 할아버지께 우산을 씌워드린 소년의 모습이 신문에 실린 적이 있어요. 갑작스레 내리는 비로 씨앗이 젖을까 급히 좌판을 정리하는 할아버지, 그 앞에 마주 앉아 우산을 씌워드리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 보는 이들을 따스하게 했었지요.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내미는 도움의 손길은 언제 보아도 감동을 줍니다.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가 어린이일 경우 우리는 더 큰 감동을 받고는 합니다. 어린아이의 행동 너머에 있는 돌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을 돕는 착한 일은 당연한 것이어야 하는데, 요즘은 특별한 경우가 되어버린 것 같아요. 오히려 착하다는 말이 어리석거나 바보스럽다는 말처럼 쓰이는 세태가 씁쓸하지요. 선함이 설 자리를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비가 내리는 월요일 등굣길, 영이는 시멘트 담벼락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할아버지를 봅니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서. 할아버지 옆에 있는 찌그러진 깡통에 빗물이 차고 넘쳐 촐촐 흘러내립니다. 아이들은 짓궂게 장난하고, 문방구 아줌마는 ‘아침부터 재수 없다’며 ‘뒈지지도 않는다’고 거지 노인에게 악담을 합니다. 등굣길에 보았던 할아버지가 마음에 걸려 아침자습을 마치고 영이는 교문 밖으로 나가 봅니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비를 맞으며 잠들어 있습니다. 영이는 누가 볼까 조심스레 좌우를 둘러보며 비닐우산을 할아버지 위에 살며시 씌워드립니다. 


 누구를 돕는 일에 조심스럽다는 것. 물론 내놓고 자랑하듯 할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도와주고자 해도 부끄럽다거나, 혹은 잘 난 체한다는 핀잔을 들을 일도 아니지요. 그런데 그런 이유들로 선뜻 나서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왕따와 같은 곤경에 처한 친구를 돕고 싶지만 자신마저 왕따가 될까 두려워 나서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의 영이도 할아버지는 돕는 선행을 하면서도 누가 볼까 봐 조심스러워하며 자신의 비닐우산을 할아버지께 씌워드리지요. 영이가 조심스럽게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요즘 아이들이 겪는 문제 때문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가까이 다가가기에 두려움 같은 것이 있어 조심스러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시가 쓰인 때가 1980년대 초이니 요즘 같이 갈등이 극성스럽지는 않았을 것으로 기대하며 복잡한 생각을 내려놓고 어린 영이의 선행을 선행답게 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영이의 비닐우산>은 시인 윤동재가 시를 쓰고, 그림책 작가 김재홍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저는 윤동재 시인을 <서울 아이들>이란 시집으로 처음 만났습니다. 시집에서 자연을 파헤치고 세운 콘크리트로 세운 도시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의 갈등과 아픔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눈을 보았지요. 시인의 따스한 눈길에 잡힌 영이를 화가가 더욱 풍성한 느낌을 담아 그림으로 표현해 냈습니다.     


몰래 씌워 드린 우산    


 그림책에서 글은 주로 화자의 목소리를 전하고 그림으로 시점을 전달하지요. 시점은 독자가 그림을 바라보는 각도라 할 수 있어요. 독자는 시점을 통해서 그림 안의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와 인물과 사물과의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영이의 비닐우산>에서는 영이가 화면에 있기도 하고 화면 밖으로 사라지기도 하면서 시점이 바뀝니다. 영이의 앞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독자가 영이를 관찰할 수 있게 하고, 영이의 뒷모습이 보엘 때는 영이의 시선이 가는 곳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이끌기도 합니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영이의 눈으로 거지 할아버지와 아이들, 그리고 주변을 관찰하고, 영이의 마음을 살펴보도록 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아닌가 짐작됩니다.


 앞뒤 표지를 활짝 펼치면 귀퉁이에 구멍이 난 영이의 초록 비닐우산이 표지 화면에 가득합니다. 표제지에 창으로 비 오는 풍경이 조그맣게 보이고 깡통으로 만든 화분에 노란 꽃이 피어 있습니다. 창문 곁에 조금만 보이는 비닐우산이 세워져 있습니다. 페이지를 넘기면 영이가 학교에 가려고 우산을 막 펼치는 장면이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보입니다. 독자는 <영이의 비닐우산>이라는 제목과 표제 그림을 보며 앞으로 펼쳐질 일들이 궁금하게 되지요.


 ‘주룩주룩 비 내리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우중충한 배경화면과 달리 영이의 노란 옷과 초록 우산이 독자들의 눈길을 끕니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작은 화면과 큰 화면을 나누어, 작은 화면으로 멀리 영이가 오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큰 화면으로는 등교하는 아이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거지 할아버지를 보여줍니다. 작은 화면에서 큰 화면까지는 꽤 먼 영이의 등굣길의 거리를 짐작하게 합니다. 


 큰 화면에는 이 책의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 거지 할아버지가 등장합니다. 거지 할아버지는 거적때기를 둘러쓰고 시멘트 담벼락에 기대어 주룩주룩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없는 듯 잠을 잡니다. 영이의 시선은 커다랗게 클로즈업한 거지 할아버지에게 머무릅니다. 거적때기로 빗물이 주룩주룩 흐르고, 가까이 당겨놓은 쭈그러든 깡통엔 빗물이 촐촐촐 흘러넘칩니다. 깡통에 거지 할아버지에게 필요한 것 대신 빗물이 가득 흘러넘치는 장면은 할아버지가 꽤 긴 시간을 그렇게 계셨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지요.   


  책장을 넘기면 영이는 화면 밖으로 나가 거지 할아버지에게 짓궂게 장난을 치는 아이들을 봅니다. 영이는 화면 안에 들어 있기도 하고 화면 밖으로 나가 있기도 합니다. 영이가 화면 안에 들어가 있는 곳은 영이의 시선이 거지 할아버지에게 있을 때이거나 할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반면 그림 밖으로 나온 장면은 거지 할아버지 이외의 사람들과 사물을 볼 때입니다. 이는 할아버지를 대하는 영이의 마음 거리와도 일치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거지 할아버지를 대하는 영이의 마음을 공감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책장을 다시 넘기면 화면은 다시 작고 큰 두 개로 나뉘어 있습니다. 작은 화면에 지나간 시간이 담겼다면 큰 화면에는 현재가 들어 있어요. ‘민친 영감태기 아침부터 재수 없게 우리 담벼락에 기대어 늘어졌노’ 뒤에서 들리는 문방구 아주머니의 험담은 작은 화면에 있습니다. 작은 화면에 남은 ‘영감태기 영감태기 뒈지지도 않고’하는 문방구 아주머니의 악담은 교실에 들어간 뒤까지도 영이의 마음속에 남아 메아리처럼 들립니다. 결국 영이는 우산을 거지 할아버지에게 씌워드리게 하지요. 영이가 할아버지께 우산을 씌워드리기까지 화면은 다른 모든 소리와 움직임은 일체 소거한 듯 영이에게로만 집중됩니다. 이 부분에서 독자의 마음도 절정에 이르러 영이에게로 몰입되어 가지요.  


  이 책은 화면 크기를 달리하거나 영이를 화면 안에 그리기도 하고 혹은 바깥으로 내어 관찰하는 모습이 되게 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구성 방식을 하고 있습니다. 작은 화면은 지나간 일, 혹은 조금 덜 중요한 것을 담고 있고, 큰 화면은 현재 혹은 보다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처럼 영이가 화면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시점이 바뀌고, 화면 크기를 다양하게 하는 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영이의 마음과 하나가 되도록 기여하고,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냥 가져가시지 


 아이들은 비닐우산을 알까요? 갑작스레 비가 내리는 날이면 신문을 팔던 아이들이 옆구리에 신문 대신 끼고 뛰어다니며 우산을 사라 외치던 아이들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파란색 비닐로 만든 대나무살 우산은 어른들에게도 기억 속의 추억이 담긴 물건이 되었지요. 일회용으로 만든 것이었지만 우산이 귀하던 시절 사람들은 대부분은 조심스럽게 다뤄서 여러 번 다시 쓰고는 했어요. 지금은 비닐우산과 같은 용도로 만들어졌지만 일회용으로는 과분한 우산이 편의점에서 팔리고 있지만요. 요즘 아이들은 우산을 잃어버려도 그닥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아요. 우산이 흔해졌기 때문이겠지요.    


  그림책은 어린이들에게 지금 자신 겪고 있는 경험과 유사한 경험세계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경험하지 않는 ‘경험 너머의 경험 세계’를 보여주지요. 가령, 카펫을 짜서 살림을 돕는 아이, 전쟁의 피해를 겪는 아이, 굶주림과 추위로 고통받는 아이 등은 많은 경우 어린이가 경험하기 어려운 사례들이지요. 그런가 하면 앞의 예보다는 비교적 작은 어려움으로 이사와 전학, 동생의 탄생으로 겪는 혼란, 형제간의 갈등 등 일상에서 격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을 그림책은 다루고 보여줍니다. 그림책을 읽는 일은 책 속 이야기와 같은 경험을 직접 겪고 있는 아이이거나 혹은 경험이 없는 아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경험치만큼 깊이와 폭을 더해 주리라 생각됩니다.  


 <영이의 비닐우산>은 이 책을 읽는 아이들에게 거지 할아버지를 대하는 영이를 통해 소외된 사람들과 관련된 사회문제의 이해를 돕고, 그들과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해보게 할 것입니다. 글은 짧고 그림이 많아서 나이가 어린아이도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 자비심을 공감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어린 자녀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엄마들에게서 자주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림책을 아이에게 어떻게 읽어줘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엄마는 감동으로 충분한데 아이에게 그것을 어떻게 전달할지 막연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을 야나기다 구니오의 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어른은 그림책 세계를 해석하고 언어화하려고 하지만 어린이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으며 책의 정서를 느낄 수 있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말의 울림을 느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린 시절 읽었던 책이 마음 밭에 뿌려둔 씨앗이 되어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싹이 트듯 기억되는 것만으로도 그림책 읽기는 의미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요즘 어린이들은 체온이 있는 말의 체험이 너무 빈약합니다. 어린이들은 일상에서 많은 언어를 접하지만 대부분은 각종 기계를 통한 것들이지요. 그러므로 어린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준다는 것은 체온이 담긴 ‘마주 언어 체험’이 될 것입니다. 책을 매개로 하여 아이와 소소한 일상으로까지 대화로도 이어질 수 있을 테지요.    

 이 책 또한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영이의 따스한 마음을 전해주기 위해 어렵게 언어화하고 해석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의 그림책 읽기 공부가 필요한 것은 아이들은 어떤 그림책을 좋아하는지, 그림 작가들이 만들어 낸 그림 문법 속의 의미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나아가 바르게 알아서 어린이가 그림책을 읽고 쓰는데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배워서 읽어줄 때 더 풍성한 책 읽어주기, 책 읽기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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