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소설 읽기 | 스프링벅
스프링벅은 남아프리카 초원에 사는 영양의 한 종류입니다. 무리를 지어 사는데 앞선 무리가 지나가고 나면 따라오는 스프링벅은 먹을 풀이 남지 않아요. 때문에 뒤 따라오던 스프링벅은 먼저 풀을 차지하기 위해 앞으로 달려 나갑니다. 그렇게 한 마리가 펄쩍 뛰어나가는 순간, 영문도 모른 채 무리 전체가 뛰어오릅니다. 앞서서 뛰던 스프링벅은 절벽 앞에서 멈추고자 하지만 그걸 모르고 달려오는 동료에 떠밀려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만다는군요.
달리는 목적을 잊은 채 무작정 달리다가 해안가 벼랑에 위태롭게 선 스프링벅은 바로 옆의 친구보다 어떻게든 앞서기 위해 그 앞에 어떤 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달리기를 강요받는 아이들이나 강요하는 어른들이 스프링벅의 운명과 닮았습니다.
고흐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 '누런 밀밭과 사이프러스 나무' 등을 통해 이름이 낯익은 사이프러스는 다 자라면 키가 25m나 되고 점차 옆으로 퍼지며 성장합니다. 엄청난 크기로 성장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넓은 간격을 두고 심어야 합니다. 하지만 묘목은 초라한 빗자루처럼 가늘어 다 자란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특성을 무시하고 나무 사이를 좁게 심으면 서로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자라지 못합니다.
책 속 아이들은 부모의 큰 그늘 아래서 건강하게 자리지 못하고 신음합니다.
이 책을 읽고 우리는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큰 틀에서는 결국 한 가지 이야기입니다만. 하나는 목적을 잊은 채 정신없이 달리기만 하다가 결국 멈출 수 없어 해안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마는 야생 스프링벅의 비극적 결말에 비유한 아이들 이야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장 후까지를 생각해 뚝 떼어 거리를 두고 묘목을 심는 사이프러스 나무 심기에 비유한 부모와 자녀의 맞갖은 거리두기를 하지 않아 생긴 슬픈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동준에게는 지금은 없는 자랑스러운 형이 있었습니다. 형과 달리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이나 태도 때문에 엄마의 잔소리를 자주 듣는 동준이 인데 형은 ‘네가 부러워’라고 말합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 가고 엄마가 자랑스러워하는 아들임에도 형은 부끄럽다며 우울해합니다. 힘들어하면서도 속내를 내 보이지 않던 형, 그런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동준은 형의 죽음이 사고가 아니라 자살이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집니다. 착해도 ‘너무 착한’ 형은 엄마가 심고 물을 주고 가지치기를 하는 대로 자라 준 엄마의 작품이었던 셈이죠. 성적이 기대만큼 오르지 않자 엄마는 부정한 방법으로 형을 입학시켰던 것입니다. 양심을 속인 것을 견디지 못한 형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 거죠. 형을 죽음으로 내몬 사람이 엄마라는 것을 안 동준은 엄마가 원망스럽습니다.
밤늦도록 아들을 감시하면서 대학입시에 장애가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창제 엄마도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엄마의 전형입니다. 창제는 가출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부모로부터 주도권을 확보하는 듯합니다. 가출은 생각처럼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청소년의 나이에 깨달음까지 얻는 가출은 더 어렵습니다. 아이들이 이처럼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데에는 어른들의 책임이 크다는 것도 알지만 어른 또한 불완전한 사람이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예슬이 부모의 이혼은 부부 사이에도 맞갖은 거리두기가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예슬이 엄마는 결혼 후에도 계속하고 싶은 공부가 있었어요. 능력과 자질도 있었지만 남편과 시어머니의 반대로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나 엄마는 이혼을 선택합니다.
성준이가 해야 할 선택을 엄마가 했기 때문에, 예슬이 엄마가 해야 할 선택을 예슬이 아빠와 할머니가 하려고 했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불행해졌습니다. 큰 나무가 묘목에 지나치게 가까이서 그늘을 지운 사례입니다.
<스프링벅> 속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로 연극 <스프링벅>이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 입학만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미키 아버지와 비보이를 꿈꾸는 아들 미키의 갈등을 다룬 작품입니다. 아이들이 준비하는 연극은 소설 속에서 현실과 작품을 경계 지으면서 소설 속 등장인물에게 현실성을 제공합니다.
연극 ‘스프링벅’은 소설 속 아이들의 상황과 흡사합니다. 자연스럽게 아이들은 제각각 스프링벅의 등장인물과 연대감과 일치감을 느끼면서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온갖 감정들을 극 중 인물에 투사합니다. 연극 ‘스프링벅’은 동준이를 비롯한 아이들의 정서적 산소호흡기 같습니다. 인공적으로 호흡을 조절하여 폐에 산소를 불어넣는 산소호흡기처럼, 연극이 불안한 아이들에게 산소 같은 정서를 불어넣어 줍니다.
짐작하는 것처럼 연극 속의 아버지는 미키의 의견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생각하는 최선이 곧 아들에게도 최선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지요. 극 중의 미키 아버지는 현실의 동준이 엄마와 흡사하며 미키는 형 성준이와 처지가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미키가 자신은 아버지가 가꾸는 정원의 정원수가 아니라며 거부하고 저항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형 성준은 어머니의 뜻대로 가지가 잘리고 구부리는 대로 아무런 저항도 못한 ‘너무 착한’ 아들이었다는 게 다르지요. ‘떠밀면 엎어지잖아요. 그래서 내 꿈도 아버지 꿈도 다 엉망이 되잖아요.’ 미키의 절규가 형 성준이의 절규 같아 동준은 미키에게 몰입해 갑니다.
이 세상에 완성된 사람은 없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다만 완성을 위해 노력하며 많은 사람들이 미완성인 채로 살아갑니다. 손장하 선생님의 ‘어른을 용서하라’라는 말은 그런 점에서 아이들에게 어른들도 부족한 사람이라는 고백으로 들립니다. 아이들은 어른의 부끄러운 고백에 대해 비웃거나 반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동준이가 완벽해 보였던 엄마가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의 불완전성을 받아들이듯이 손장하 선생님의 고백을 통해 아이들은 어른들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성장기의 아이들은 성장 그 자체만으로도 버거운 나이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선택은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끝을 모른 채 질주하는 스프링벅의 운명에 함께 빠져버릴지 ‘다른 풀밭’에 눈을 돌릴지, 서로가 잘 자라서 각자의 몫만큼 바람을 막아주고 그늘을 만들어 주는 사이프러스 성인목이 될지, 많은 선택 앞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1. 사이프러스 나무 심기처럼 사람들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각각 어느 만큼의 거리가 적당한 거리라고 생각하나요?
부모와 나 -----
선생님과 나 ------
친구와 나 -------
2. 아픈 기억이 상처로 남은 동준과 동준이 엄마처럼 우리도 많은 상처를 입으며 살아갑니다. ‘충분히 아파하라는 말도 있고 상처가 아무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도 있어요. 왜 그런지 이 말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3. 지금 내 사이프러스 나무는 햇살을 충분히 받으며 자라고 있나요? 아니라면 나의 사이프러스 나무에 그늘을 드리우는 것은 무엇인가요? 혹은 누구일까요?
4. 연극 ‘스프링벅’은 동준이를 비롯한 아이들의 정서적 산소호흡기 같습니다. 인공적으로 호흡을 조절하여 폐에 산소를 불어넣는 산소호흡기처럼, 연극이 불안한 아이들에게 산소 같은 정서를 불어넣어 줍니다. 여러분에게도 정서적 산소호흡기가 있나요?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