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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패티 Nov 02. 2019

아름다운 글자

요즘 생각

        

K가 돌아가신 할머니가 쓰시던 물건을 정리하다 

서랍장 앞면에서 발견한 글자라며 사진을  보여주었다. 

'ㄷ'의 앞뒤가 바뀐, 받침도 맞지 않은 글자 "도작". "도장"이어야 할 할머니의 글씨였다.

자식과 손자들이 성장해 모두 떠나고 혼자 남았을 때 비로소 필요해진 글자. 

도장을 어디에 두었는지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 때문에 할머니는 글자를 배우셨다. 

할머니가 글자를 배워 살뜰히도 사용하셨다며, 

K는 할 수만 있다면 서랍에 새겨진 글자를 그대로 파오고 싶었다고 했다.

애틋해하는 K를 안아주었다.     

  

종로 송월로에 있는 서울자유시민대학 갤러리에는 할머니들의 시화가 전시돼 있다. 

한글학교를 다니며 배운 한글로 쓴 할머니의 시와 그림. 

한글을 몰라 겪은 할머니들의 안타까움이 절절하여 어느 한 편도 쉽게 지나쳐갈 수 없었다.

“너는 글 잘 모르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할머니는 친구와 화장품 가게를 시작한다. 

명의도 카드도 모두 할머니 앞으로 해주었다는 고마운 친구. 

하지만 어느 날 친구가 은행에서 3억 7천만 원이라는 큰돈을 대출을 받아 도망 가버렸다. 

날벼락이었다. 아들 방까지 빼서 빚을 갚으며 눈물을 쏟았다.  

“글만 알았어도, 글만 알았어도 ---.” 

할머니는 기를 쓰고 공부를 시작했다. 이제 은행도 혼자 가고 사인도 한다. 

사기당한 돈이 비싼 수업료였다는 할머니의 시를 읽으며 탄식이 절로 나왔다.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아흔일곱 연세의 이옥남 할머니가 쓴 일기를 모은 책이다.

할머니는 오라버니 등 너머로 글자를 써보다 부엌 아궁이 앞에 재를 긁어내서

‘가’, ‘나’ 글자를 쓰며 한글을 익혔다. 시부모와 남편 앞에서는 글자를 아는 체하지 못하고 살다,

두 사람이 모두 세상을 뜬 뒤에야 내놓고 글자를 쓸 수 있었다. 

할머니는 “글씨가 삐뚤빼뚤 하도 미워서 글씨 좀 늘어 볼까” 해서 

날마다 글자 연습을 하느라 일기를 썼다. 

할머니 글씨가 이쁘고 미워서 문제가 될 게 무언가. 

하지만 글자를 썼고, 글이 되었고, 책이 되었다.         


충북 음성에서 농사를 짓는 한충자 할머니는 일흔이 넘어서 처음 한글을 배웠다. 

글을 몰라 결혼을 하고 군대 간 남편이 보낸 편지를 읽지 못했다.

아내가 글을 모르니 답장은커녕 읽지도 못했다는 것을 남편은 휴가 나와서 알게 된다. 

남편은 아내가 읽을 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편지를 썼고

아내는 그 편지를 품고 많이도 울었다.

‘지옥에 가서라도 한글을 배워 편지를 읽어야지’ 생각을 품고 살았다.     

하루하루가 고단했던 할머니에게 한글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일흔이 넘어서야 왔다.

한글학교를 졸업하고, 한글을 더 배우고 싶어 들어간 반이 시 창작반. 

시를 쓰면서 할머니의 삶은 변했다. 밤마다 돋보기안경 너머로 시를 읽고, 시를 쓰고, 나뭇잎 하나라도 자꾸만 들춰보는 삶으로. 

할머니는 50년 만에 남편에게 답장을 썼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가 한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편지를 보낸 당신.”    

  

한글날 <유 퀴즈 온 더 블록 2>(TV 프로그램)가 '양원학교'에 갔다.

양원학교는 한글을 배우는 어른들이 다니는 학교다.

카메라가 서태종, 박묘순 노부부를 비췄다.

어린 시절 집안 형편 때문에 글자를 배우지 못해 겪은 눈물 나는 이야기를 노부부는 담담히 들려주었다.

남의 도움 없이는 은행 거래도 하지 못하고, 롯데리아에 가서 맥도널드를 달라고 하고,

음식점 메뉴판을 읽지 못해 글자를 몰라도 주문할 수 있는 중국집이나 한식집만 더러 갔다는 이야기들을.   

선한 인상의 노부부에게 사회자가 물었다.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무엇인가요?"

"박묘순!"

할아버지는 아내 이름을 적었다. 

"나를 살아가게 하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이 사람 때문에 살았다."

할머니 역시 '사랑하는 우리 신랑 행복하게 사십시다'라고 적었다. 

그 사랑이, 쉽지 않았을 삶을 버텨내게 했겠구나.  

사람이 사랑스럽고, 마음 따뜻하고, 환하게 하는 말과 글.

한글이 할머니들께로 가서 더 아름다운 글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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