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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랑 Jan 12. 2022

만남은 쉽고 이별은 어려워

버리고 비우기

만남은 쉽고 이별은 어려워
눈빛에 베일듯 우린 날카로워...


아직 얼마 지나지 않은 작년 연말, 이 노래를 정말 많이 들었다. 쇼미더머니는 매번 챙겨보는 나이기에 어느 순간부터 동태눈을 하고 관성적으로 챙겨보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이 노래 덕에 즐거웠달까. 꿈을 갖긴 쉽지만 꿈을 포기하기는 어렵다는 노랫말을 들으며 출퇴근길에는 살짝 눈시울이 붉어지기까지 했다. 최근엔 새로 좋아하는 밴드가 생겨 플레이리스트 저 아래로 밀려나긴 했지만, 다시 생각이 났는데... 다름이 아닌 짐 정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물건 버리는 거 저만 어려워하나요?


호더(hoarder). 보통 부정적으로 쓰이곤 하는 이 말은 쌓아두는 사람, 그러니까 '축적가'라고 나와있다. 솔직히 나는 호더 수준은 아니지만 물건을 버리기 참 힘들어한다. 전시나 공연을 다녀오면 곧장 쓸모가 없어지는 티켓이나 팜플렛, 이벤트 배너, 심지어는 폭죽이 터지며 날리는 종이띠까지도 주워와서는 버리질 않는다. 잡지도 분철해서 보관하는 사람들이 제일 신기하다. 다른 페이지가 보고 싶어지면 어떡해? 그럴 일이 없다는 걸 내가 제일 잘 알면서도 그저 모아두기 바쁘다. 이렇게 적고 나니까 호더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지구 상에 많은 구체적인 어려움 가운데, '버리기'라는 관념적인 어려움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정리의 달인이라는 유명인은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고 했지만, 그 말을 따라도 어려움이 있다. 나는 굉장히 쉽게 설레는 사람이기 때문. 내 공간에 들어왔다는 것은 결국 내 마음에 들어왔다는 말과 같다. 필요에 의해서 사거나 얻은 것들도 있지만 그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고 고르기 때문에 버리는 일은 힘들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인해 옷을 버리기가 참 어려웠다. 여러 물건들 가운데서도 옷은 가장 내 주관이 많이 들어간 선택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조금은 날씬했던 그때는 이런 스타일을 좋아했었구나~ 돌이켜보기도 하고, 가죽처럼 입고다녔던 체육복이나 과잠바를 보며 추억에 잠기기도 한다. 그래서 옷을 자주 사는 편도 아니고 힙스터는 더더욱 아니지만 쌓인 옷이 많나보다. 수납도 많이 되지 않는 조그만 원룸이지만 공간박스와 옷장에 옷들이 꽉꽉 들어차있다. 하나하나 정리하며 보면 추억이지만 쌓인 박스들은 골칫거리다. 그러니까, 내 눈앞에 있는 과잠바는 구체적인 추억이지만, 옷더미 속에 쌓인 과잠바는 '쓸모 없는 것'으로 뭉뚱그려지는 것이다.


버리기 어려울 땐 옮길 생각을 해보자


이렇게 피곤한 성격이기에 이사 전 옷 정리는 생각보다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의외로 빠르고 쉽게 이루어졌다. 새로 이사갈 곳에 이걸 다 갖다 놓는다고 생각하니 일이 쉬워진 것이다. 옮기는 과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가서 정리할 일도 떠올려봤다. 아직 이사가려고 하는 동네의 방 몇 개만 겨우 둘러보고, 계약까지도 한참 남은 시점이지만 인간의 상상력이란 생각보다 뛰어나다. 피의 숙청은 불가피했다. 옷 정리의 경우엔 먼지 어린 숙청.


처음에는 안 입는 옷들을 정리하면 헌옷 수거함에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최근 몇 년간 헌옷수거함을 본 적이 있던가? 일단 주변에서는 없어서 맘카페와 당근마켓 동네생활에 검색을 해봤다. 멀지 않은 곳에 수거함이 있다고는 나온다. 하지만 짐을 들고 가기에는 상당한 부담이 되는 거리였다. 그렇다고 해서 버리기는 아깝고, 부피도 너무 클 것 같았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입지 않는 옷이 정말 많았기 때문에.


이럴 때 좋은 방법이 있다. 인터넷에 '헌옷 수거'를 검색해보면 집에 와서 옷을 수거해주는 업체가 있다. 아마도 헌옷을 해외로 수출하는 업체 같은데, 이후 과정은 내가 알 길이 없고 일단 와서 수거를 해준다는 게 좋아보였다. 심지어 내가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일정 무게를 넘기면 단위당 가격을 매겨 돈을 준다. 큰 돈은 아니어도 돈을 내고 버리지는 않아도 된다는 것. 내가 정리한 옷의 무게는 일정 무게를 넘기지는 않아 무료로 수거해가셨다. 옷을 쌓아두었던 리빙박스는 홀쭉해지고 내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컨디션이 좋은 물건은 중고로 팔자


요즘 내가 카톡만큼 자주 들어가는 어플이 당근마켓이다. 옷을 정리하면서도 멀쩡하거나/브랜드가 있거나/아무튼 조금 더 아까운 것들은 따로 모아서 당근에 올렸다. 당근마켓은 꽤나 후려쳐야 팔리는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소소하게 용돈 벌이하기에는 좋다. 가입하고 나서 판매한 물건이 벌써 37개나 되잖아...? 그중에 절반 이상은 한 달 이내에 올린 것들이다.


꼭 옷이 아니어도 쓸만한 물건들은 올려보면 좋을 것 같다. '이게 팔리겠어?'라고 생각한 물건도 의외로 팔린다. 그 예로, 내가 면접을 보러 갔던 어느 회사의 로고가 박힌 컵이 있다. 대체 이걸 누가 살까 싶으면서도 새 거라서 버리기가 아까웠는데, 사가는 사람이 있더라.


버리면서 깨달은 것들


무작정 쌓아두는 습관으로 버리기를 어려워했던 나지만, 정신을 차리고 옷을 정리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후련하고 기분이 꽤나 좋아졌다. 쌓아둔 물건도, 근심도 배출을 하고 나면 의외로 별 거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천성은 변하기 힘들기에 '앞으로 미니멀리스트로 살겠다!' 따위의 다짐을 할 수는 없지만, 아깝다고 몇 년간 눈길도 주지 않은 것들을 쌓아두는 일은 자제하자고 결심했다. 이미 좀 지나버린 새해 다짐으로 '잘 버리기'를 새겨 두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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