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폴챙 Jul 29. 2022

나는 매일 무선 청소기를 10분씩 돌린다


나는 매일 청소기를 돌린다. 매일 10분씩 돌린다. 딱 10분만 돌리는 이유는 무선청소기를 강력 모드로 사용하면 딱 10분 만에 배터리가 방전되기 때문이다. 한 번 충전으로 최대 10분밖에 못 돌리기 때문에 하루라도 돌리지 않으면 오늘의 청소할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왠지 아깝다. 친구가 집들이 선물로 청정스테이션과 함께 세트로 선물해준 청소기라 제대로 뽕을 뽑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말이다.




지난주에 아내가 영화관 정액제를 끊어줬다. 영화관에서 매주 보고 싶은 영화 3편을 볼 수 있는 정액제다. 매주 금요일 아침에 재충전되는데, 그래서 목요일까지 영화 3편을 못 보면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이다. 이번 주에는 탑건: 매버릭(Top Gun: Maverick)과 놉(Nope) 이렇게 두 편을 봤다. 이번 주는 손해 봤다.




요즘 세바시 대학에서 강원국 작가님이 가르치는 글쓰기 전공 패키지를 듣고 있다. 세바시 대학의 수강생은 세바시 웹사이트에 있는 모든 유료 클래스를 무료로 들을 수 있다. 유료 클래스를 다 합치면 자그마치 400만 원 상당의 가치라고 한다. 내 세바시 대학 수강생 혜택은 2022년 11월 30일에 마감된다. 시간이 간다. 나는 11월 30일까지 유료 클래스들을 다 못 들을 것 같다. 또 아까울 것 같다.




미국 아마존에는 무제한 킨들(Kindle Unlimited)이라는 정액제 서비스가 있다. 매달 서비스에 포함되어 있는 전자책을 무제한으로 빌려 읽을 수 있는 서비스다. 가끔 한 달에 책을 몇 권 읽지 못할 때면 '차라리 정액제 낼 돈으로 종이책이나 한 권 살 걸!' 하는 생각이 들어 아깝다. 하지만 요즘엔 아내가 나 대신 잘 읽어주니 안 아깝다.




나는 군인이다. 군인이다 보니 주기적으로 집 떠나 훈련을 받으러 간다. 훈련 스케줄이 나오면 타이머가 시작된다. 훈련 날짜가 오면 나는 아내와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때까지 아내와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그때는 아내와 시간을 보낼 수 없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있는 시간이 소중하다.


어쩌면 사람과의 관계도 정액제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그 사람과의 시간을 누리지 않으면 지나간 시간은 다시 누릴 수 없다. 그리고 그걸 깨닫게 되면 그 사람과 누리지 못한 시간이 정말 아까울 거다.




청소기를 돌릴 때면 안이 들여다 보이는 먼지통에 먼지가 쌓이는 게 뿌듯해다. 집안이 깨끗해지는 기분이 든다. 청소가 끝나면 청소기에서 먼지통을 분리해 청정스테이션에 탁 꽂는다. 그러면 먼지통 밑 부분 뚜껑이 자동으로 탁 열리면서 먼지통이 자동으로 비워진다. 먼지 날림 없이 먼지통을 비울 수 있는 혁신적인 기술이라고 한다. 하지만 머리가 긴 여성이 있는 집에선 이 혁신적인 기술이 별로 빛을 발하지 못한다. 먼지통 안에 있는 둥근 원형 필터 주위로 긴 머리카락이 먼지 덩어리와 함께 엉겨 붙어 항상 먼지통에 손을 넣어 꺼내 줘야 한다.


한 3주 전에 아내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국에 나갔다. (나는 미국에 산다) 아내가 없는 집에서 청소기를 돌렸는데 먼지통 안에 아내의 머리카락이 엉겨 붙어 있으면 왠지 반갑다. 꼭 아내가 아직 집에 있는 것만 같다.


오늘은 먼지통을 비우는데 손을 넣지 않고도 청정스테이션에서 먼지통이 시원하게 비워졌다. 우리 집 카펫에서 아내의 머리카락이 사라져 버렸다. 아내가 없는 집이 조금 더 쓸쓸했다. 아내가 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엇이 3,800년 전 그 남자를 사랑꾼으로 만들었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