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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챙 May 26. 2021

지금 약을 먹으면 그때쯤 잠이 올까요

일찍 자야 하는데, 잠이 오질 않네요.

일찍 자야 했는데, 잠을 자지 못했죠.


오늘은 자야 하니까, 잠 오는 약을 샀어요.

이제 곧 자야 하는데, 또 잠이 오질 않네요.


오늘은 자야 하니까, 약을 먹어야겠어요.

어쨌든 자야 하니까, 이제 그래야겠어요.


지금 약을 먹으면, 언제쯤 잠이 올까요.

지금 약을 먹으면, 그때쯤 잠이 오나요.


지금 약을 먹으면, 난 잠에 들 수 있나요.

지금 약을 먹으면, 난 깨어날 수 있나요.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지. 일찍 일어나 상쾌하게 운동을 하고,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느긋하게 준비를 하고,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하루를 시작해야지. 매일 아침 시간에 쫓겨 서둘러 하루를 준비하며 다짐하지만, 오늘 밤엔 꼭 일찍 자겠다고 다짐하지만, 또 밤이 오니 일찍 잠드는 게 아쉬워집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래, 몇 시간 못 자도 괜찮아, 그래도 내일은 꼭 일찍 일어날 거니까. 그러면 내일 저녁엔 피곤해서 일찍 잠들 수 있을 테니까.'


다음 날 아침에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렇게 일찍 일어나 버리면 결국엔 하루를 망칠 거라고, 피곤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거라고,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나를 다독이며 결국 울리는 알람을 늦추고야 맙니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고, 오늘은 일찍 잠에 들 거라고, 독한 마음을 먹고 집에 오는 길 수면제도 한 통 삽니다. 오늘은 꼭 일찍 잠들어 버리겠다고.


몇 시에 일어나야 할까? 몇 시에 일어나면 조금만 뛰어도 헐떡이는 내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거리를 달릴 수 있을까. 내 생각엔 새벽 5시.


몇 시간을 자야 개운할까? 몇 시간을 자면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에 일어나도 피곤하지 않을까. 몇 시간을 자고 알람이 울려야 넌 충분히 잔 거라며 다시 알람을 늦추지 않을 수 있을까. 아마도 7시간.


새벽 5시 빼기 7시간은 밤 10시. 그 전에만 잠들면 되겠다는 만족스러운 결론을 내리고 저녁을 보냅니다.


8시. 9시. 잠들어야 하는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평소처럼 잠은 오질 않고, 초조해지는 마음에 약을 꺼내 포장지를 읽어봅니다. 취침 전에 두 알을 먹으라고 하는데, 언제쯤 먹어야 잠자리에 들 수 있을지, 언제쯤 잠을 잘 수 있을지. 지금 먹으면 10시에는 잠들 수 있을지, 오늘도 너무 늦어버린 건 아닌지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두 알 말고 세 알을 먹으면 더 금방 잠에 들 수 있을지, 하지만 그러면 내일 아침 알람도 못 듣고 계속 자지는 않을지 또 걱정이 됩니다.




하룻밤을 일찍 자고 일어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다음날 아침을, 고작 하루를, 계획대로 뿌듯하게 보내기도 이렇게나 힘이 드는데, 내 인생은 어떻게 계획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지금보다 달라져야 한다고, 계속 발전해야 한다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려면 나를 이렇게 가꾸고, 좋은 아빠가 되려면 저렇게 준비를 하고, 행복한 노후를 보내려면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앞으로 해야 할 것, 그리고 이제는 그만 해야 할 것은 왜 이리도 많은지.


나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든든한 남편이 될 수 있을지, 닮고 싶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 힘들 때 생각나는 따뜻한 할아버지가 될 수 있을지, 나는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나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맞는지, 혹시 그러기엔 너무 늦어버린 건 아닌지...



배경 이미지 출처: Photo by Klemen Vrank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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