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ul Sep 21. 2022

누구나 찾아오는 순간을 직면한 뒤

조화의 의미는 여러가지인데, 수가 얼마나 있냐를 셈하는 문화가 이번엔 좀 씁쓸해보이기도 했다. Paul 제공

지난 주말, 여유롭게 당직 근무를 서다 한통의 연락을 받았다. 최근 몸이 급격하게 쇠약해지신 할머니의 부고 소식이었다. 외부 스케줄을 진행중이던 동생은 바로 지하철에 올라탔다. 나 역시 근무를 약 3시간 남겨둔 때였는데 곧바로 업무 종료를 추진했다. 이 척박한 기자 사회에서 버틸 수 있는 건 그래도 아직까지 남아있는 선후배 간 끈끈한 무엇 때문이다. 이번에도 이는 발휘됐다. 경황이 없는 나를 위해 당직을 함께 서던 선배는 남은 근무를 자청했고 데스크는 필요한 행정 처리를 혼자 떠맡으셨다. 그렇게 경조휴가가 시작됐다.


아직 끝나지 않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국 속 장례식장을 잡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한자리가 남아 돌아가신 다음날부터 문상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이랬다. 가족을 집과 빈소로 실어나르는 것, 방문한 손님 가운데 아버지 손님이라면 인사와 안내 등 대면 업무를 하는 것 등이었다. 이따금씩 택시를 잡지 못한 조문객 수송도 했고 소화를 제대로 시키지 못하는 친지를 위해 약국을 방문하는 일들도 했다. 어떻게 보면 심플한 일들인데 짧은 시간이라도 잠을 자기 위해 누웠다 일어나면 몸이 꽤나 무거웠다. 정신력으로 버티는 느낌이었다랄까.


할머니의 자식 중 현역은 막내인 아버지 뿐이었다. 이에 빈소는 아버지 손님들로 가득 찼다. 평소에는 아주 사소한 것도 자랑을 일삼치 않으신 아버지는 장례 기간 동안 입이 마르시도록 내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뭐 칭찬이랄 게 없었지만 조문한 손님들에게 나를 인사시키며 ‘제 아들이고 ㅇㅇ기자입니다’는 말을 빼먹지 않으셨다. 그러곤 식사 자리에 앉으면 일회용품을 아들 회사에서 모두 제공했다고 또 설명하셨다. 손님들을 배웅하실 땐 아들 회사에서 온 조화를 보이시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평소 사람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자세를 낮추시는 아버지였는데, 어느새 머리가 듬성 듬성 비어보이는 그의 자랑은 나였음을 새삼 깨닫게 됐다.


아버지는 평생 당신이 믿는 윗분에 대해 다른 가족들에게 강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리고 어떠한 배척도 하지 않으셨다. 꼭 막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넘어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거나 나서야 할 일들이 있으면 먼저 손을 드셨다. 이번 장례 때도 그랬다. 보통 장례를 치르면 부조를 들어온 사람별로 분류한 뒤 장례 비용을 정산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장례 시작 전 “내 이름으로 들어오는 부의금 전부는 장례 비용으로 써달라”고 선언하셨다. 이후 비용은 1천만원이 훌쩍 넘게 청구됐는데 아버지 부의금으로 3/4 이상을 처리할 수 있었다. 물론 어머니는 이 과정에서 어떤 의견도 덧붙이시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줬다.


이런 모습들이 눈에 보일 나이가 되니 장례식은 크게 와닿았다. 그래서 슬픔이 컸는데, 사실 손님들을 응대하면서는 별다른 감정이 새어나오지 않았다. 처음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날 밤 잠을 설쳤을 뿐 감정이 요동치진 않았다. 내가 눈물샘을 터뜨린 건 입관 때였다. 큰아버지도 고모도 소리내어 흐느껴 우는데 아버지는 덤덤하셨다. 그리고 할머니의 굳은 얼굴과 손, 발을 만지셨다. 분명 막내인데, 누구보다 슬플 텐데 아버지는 버티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자니 마음이 아팠다. 예순이 넘어 곧 은퇴를 바라보는, 세상에서는 어른이지만 할머니에겐 아직도 뒷바라지가 필요한 철부지 막내 아들일테니까.


수많은 감정이 스쳐갔다. 특히 할머니께서 보여주셨던 드러나지 않은 사랑이 떠올랐다. 직업이 아닌 군 생활을 하는 의무경찰 시절에도, 집 앞에 순찰차가 오면 손자가 탔는지 확인하셨단다. 집을 방문하면 매번 몇만원이라도 쥐어주려고 하셨다. 한사코 거절해도 자동차 창문 너머로 던지시기까지 하며 말이다. 휴대전화로 모든 게 해결되는 세상인 걸 모르셨던 할머니는 하여튼 손자의 꿈을 응원하셨다. 그런 그가 평온하게 누워있는데 참 많은 눈물이 흘렀다. 평생 가족들만 바라보셨을 그, 큰아버지는 내게 “참 기뻐하셨다. 손자들이 잘 되어서“란 말을 전해주셨다. 이 말이 상기되니 눈시울이 더 붉어졌다.


3일의 시간이 지나고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계신 현충원으로 가셨다. 모든 절차가 마무리 됐고 가족들은 작별 인사를 했다. 묘역 뒤로 펼쳐진 하늘을 우러러보니 높다고 하는 가을 하늘이 그렇게 맑을 수 없었다. 참 평온해 이같은 마음이 계속됐으면 좋겠다 싶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복귀한 일상에는 산적한 스케줄들이 많았다. 굳이 쳐다보려하지 않았는데 취재원들로부터 걸려온 전화가 요란스럽게 울리며 현실을 자각하게 만든다. 주어진 삶을 잘 살아내고 있나 돌아본다. 이렇게 가는 것이 맞는지 오답은 아닌지 알려주는 이가 딱히 있지도 않다. 후회하지 않는 인생은 어떤 걸까 곱씹게 되는 하루가 흘러간다.

작가의 이전글 어느날 하게 된 이런저런 생각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