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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Dec 13. 2022

격차 해소의 기준은

2017년 겨울 베트남의 한 고아원을 방문했는데 해맑았던 아이들의 웃음이 문득 떠오른다. Paul 제공

얼마 전 올라온 유튜버 '희철리즘'의 인도 방문 영상을 봤다. 이 나라의 빈부격차는 그 어떤 나라보다 심화했고 많은 국민이 가난한 삶을 살고 있었다. 영상에 등장한 인도 부유층 여성 말에 따르면 부자 대부분은 기독교인이다. 인도 사립학교는 주로 기독교를 바탕으로 운영되는데 이곳들의 교육 질이 우수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육받은 학생들은 사회 곳곳에 진출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이같은 이유로 여성은 인도의 많은 부자가 기독교인이라고 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지만 왜 부자 기독교인 너네는 비기독교 학생들을 품는 좋은 학교를 세우지 못하냐고 교리를 들먹이며 손가락질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미 그들을 위한 사립학교는 존재하나 다른 신 아래서 교육할 수 없다는 신념이 격차 해소의 기회를 막아서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빈민가 다수의 부모는 소위 '더 나은' 환경을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좋은 교육을 받는 게 현재 모시는 신의 곁을 잠시 떠나야 할 만큼 중요치 않다 여길 수 있으니까.


국내 상황은 어떤가. 필요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라면 눈 딱 감고 속할 수 있다 정도가 만연한 풍조가 있다. 매주 일요일 교회 성가대 솔리스트로 봉사하면서 재학 중인 학교는 선화예술중고등학교인 예가 바로 그렇다. 단적이지만 희철리즘의 말처럼 끼리끼리 만나기에 무언가의 문화가 형성되고 이는 밀어주고 끌어주는 시발점이 되니까. 타고난 가문의 절대성을 극복할 수 없다면 교육 격차라도 줄여야 작은 기회라도 얻을 수 있는 세상이다. 기민하지 못하면 "그것 밖에 안 되나"라는 말을 듣기 쉽상이니 말이다.


학부 시절 문화를 만드는 기업의 사회공헌 대외활동에서 교육 격차를 주제로 발표를 한 바 있다. 그때 아먀는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교육 격차를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으면 소외아동도 결여된 환경을 극복하고 꿈을 이뤄낼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결과를 덧붙였다. 당시 내가 왜 이주제를 선택했는지 가물하지만 격차 해소를 위한 대안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격차란 단어 의미 자체를 곱씹지 않고 말이다.


이 발표를 할 땐 구체적인 결론을 내놓지는 못했다. 토론의 장을 만드는 게 목적이었기도 했지만 사실 교육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근본적인 해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 세계 기근과 기아가 사라질 수 없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미국의 한 주에서 생산하는 1년치 곡물로 해당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각종 국제기구와 구호단체를 통해 원조를 하고 있지 않나.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을 없애면 되는데 이것을 찾아낸 학자가 있었다면 이미 노벨상을 받았을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한 토론은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오늘날 국내를 비롯해 아프리카, 동남아 등에서 각종 학교나 프로그램을 설립해 교육의 장을 열어주고 있지 않나. 장학사업을 통해 성인이 되기 전까지 갖가지 혜택을 주기도 한다. 도심지역에서 태어났지만 가난하거나 출신이 빈민가, 오지 등일 경우 비슷해보이지만 엄밀히 다름이 존재한다. 전자는 사회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했고 후자는 그렇지 못하다. 소위 말하는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이 동일할 뿐이다. 단순히 교육 사업을 진행하는 게 정답인지 의문이 드는 지점이다.


대를 이어가는 직업을 가질 수 없는 환경에서 열심히 공부해 알아주는 대학과 직장에 들어가는 게 격차 해소에 속하는 건가. 실제로 국내 한 아동센터 생활을 한 학생이 유수 사범대학에 입학한 사례를 취재한 바 있다. 당연히 야마는 "나도 했으니 너희도 할 수 있다"였다. 이런 모습을 갖추지 못하면 격차 해소 요건에 들지 못하고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 가운데 하나로 봐야 할까. 나 역시 그동안 단면적인 부분을 들춰보며 이런 류의 사례를 '성장'이라 여겨왔다. 더 생각해보니 적잖은 오해와 착각이었다.


어쩌면 빈민가 출신들을 대상으로 삼는 것 조차 오류에 해당할 수 있다. 오지에서 아이폰14가 쓸모 없는 벽돌에 불과한 것처럼 격차란 단어 역시 무의미한, 우리에게만 중요한 개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적용해 글 맨 앞으로 돌아가 매조지를 시도한다면 인도 기독사립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굳이'일 수도 있겠다 싶다. 이 모든 상황 가운데 문제라고 지적하며 해결책을 만들려는 시도를 하는 무리들은 대개 가진 자라고 칭함을 받고 있기에 그렇다.


내가 지금 몸담고 있는 곳은 막걸리 대학교 출신들이 포진돼 있다. 이 대학 근처의 역도 가보지 못한 내가 이 조직에서 글밥을 먹고 있으니 어찌어찌해서 사다리를 타고 온 난 격차 해소에 성공한 걸까. 돈도 빽도 없는 부모 밑에서 이처럼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내 부모와 주변이 재능을 발굴해 구체화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줬기 때문이다. 재능이라고 해 거창하지 않지만 이는 출신 배경에 구애를 받지 않는 타고난 것이지 않나. 울퉁불퉁한 찰흙을 잘 빚을 수 있는 방법을 얻은 게 나의 트리거였다.


지난 2019년 3월 세계적으로 유명한 석학 교수 인터뷰를 간 적이 있다. 학생들을 어떻게 교육하냐고 물었더니 그는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들어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은 특별한데 그 이유는 저마다 다른 지문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가치를 알도록 끊임없이 독려한다고 덧붙였다. 이 글을 쓰며 인터뷰를 다시 봤는데 참 알 수 없는 세상이다 싶었다. 딱 하나 뿐인 지문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의 모습이 천차만별이니 말이다. 저마다에게 사명이 있다면 창조주는 어떤 생각으로 근원적 현상을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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