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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Dec 27. 2022

도달했는지도 가늠하기 힘든 그것

차 문을 열기 전 문득 기름값 걱정 없는 관용차를 탈 날이 올까 궁금해졌다. Paul 제공

어제 오랜 만에 회사로 들어갔다가 퇴근 무렵 보도 대표와 함께 지하주차장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왜 그토록 길게 느껴졌는지. 엘리베이터를 빨리 내리고 싶었는데 대표와 내가 차를 주차해뒀던 층수가 같았지 뭔가. 아주 빠르게 목례를 날린 뒤 내 차로 피신을 했다. 시동을 걸고 차가 데워지길 기다리는데 눈에 들어왔던 건 대표의 차였다. 전기차도 아닌 게 전기차의 문 손잡이를 가진 G90이었다.


대표 차를 뒤따라 지상으로 올라가며 많은 생각이 스쳤다. 평기자로 시작해 저 자리에 오르기까지 숱한 과정이 있었을 텐데. 어느 누가 수습부터 '난 국장을 거쳐 대표가 될 거야'라고 생각하겠느냐만 동기 중에 딱 한명 나올까 말까한 직급에 올랐으니 성공했다 말할 수 있는 걸까. 어떤 일을 해내는 자리인 걸 알기에 딱히 부럽지는 않았지만 내가 퇴직을 바라볼 때 G90을 '허'로 끌 수 있는 직장인이 되어 있을까 대뜸 궁금해졌다.


어떻게 해야 대표실 책상 위에 내 이름이 박힌 명패를 올려놓을 수 있을까. 출입처와 취재원 관계를 돈독히 만들어 단독 기사를 줄기차게 써 회사와 업계에서 인정을 받으면 되는 걸까. 물론 대표 내정 풀에 들어가는데 필수적인 자격 요건이 되긴 할거다. 사실 이보다 중요한 건 경쟁자들을 쳐내는 것이다. 언젠가 선배들과 식사하며 데스크급 선배가 이제 곧 데스크가 될 연차의 선배에게 한 말이 있다. 오늘의 동기가 내일의 적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굳이 대표직까지 오르지 않더라도 과연 성공한 직장 생활은 무엇이란 말인가. 회사를 빠져나와 꽉 막힌 고속도로로 진입하니 눈에 띄었던 많은 차의 종류는 제네시스였다. 번호판의 대부분은 '허'를 달고 있었다. 최소 전무급 이상이란 건데 적어도 여기까지 오르면 성공했다 회고할 수 있는 걸까. 6시 무렵임에도 교통체증이 심화했던 월요일 저녁이었는데 무언가 내가 앞으로 헤쳐가야 할 미래란 이름표의 과제인 것 같기도 했다. 이를 생각하니 답답함을 토로하기 위해 내쉰 숨이 차 안 가득했다.


누군가 '상대적 박탈감'이란 단어는 좋지 않다고 했다. 상대적이란 말은 남과 나를 비교했을 때 드는 마음이기에 그렇다. 굳이 다른 것에 시선을 두지 않고 내게 주어진 것만 본다면 받은 복을 성심껏 세어볼 수 있단 거다. 맞는 말이었다. 어제 퇴근하며 들었던 라디오의 한 사연에 따르면 대학을 졸업했으나 취업을 하지 못해 카페에서 준비를 한다는 것이었다. 원하는 직무는 고사하고 바늘 구멍보다 좁은 취업의 문을 뚫기도 힘든 시대에 급여가 꼬박꼬박 나오는 회사를 다니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런데도 외항사 취업으로 다음주 한국을 떠나는 친구를 부러워하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친구에게 한 말은 다음과 같다. 이제 비로소 틀에 박힌 한국의 갖은 '해내야 할 일'로부터 해방됐다고. 최근 나를 보는 어른들마다 '만나는 사람 있냐'고 묻는다. 안정된 직장을 가진 다음 '해야 할' 일로 여기는 결혼을 하란 무언의 압박이었다. 괜찮은 사람이 있으면 하겠다고 답했는데 괜찮음의 기준은 무엇인지 말을 내뱉은 나조차 알쏭달쏭했다. 이런 관념적 의무와 시선에서 벗어날 친구가 꽤나 좋아보였다 고백한다.


완악한 인간은 이미 쥔 것을 주머니에 넣고 다른 주머니에 새롭게 넣을 무언가를 끊임없이 탐색하려 한다. 아이폰 14프로를 쓰고 있으면서 내년에 나올 15 시리즈를 눈독들이는 게 그렇다. 직장인으로서의 향방도 별반 다르지 않은 과정을 거쳐 결정된다고 본다. 이 사회에서 원하는 목표를 꼭 이룰거야란 응원은 사실 ‘널 마음껏 뽐낼 수 있는 걸 얻어내’란 의미로 통용되지 않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지만 내실과는 관계없이 보기에 좋은 게 최고로 여겨지는 요즘이니까. 상대적 박탈감의 시작은 어쩌면 여기서부터 시작된 게 아닌지 곱씹어봐야 한다.


오는 1월 예정된 모교 취창업 특강에 다시 부름을 받았다. 멘토들의 회사는 카카오, 현기차, 은행 등 모두 화려했다. 학부 시절 내가 재학생인줄도 몰랐을 취창업센터가 나와 그들을 부른 기준은 무엇이고 라인업에 없는 수많은 졸업생과 차이점은 뭔가. 후배들을 만날 자격은 지갑 속에 멋드러진 명함을 갖고 있는지 여부인 걸까. 지난 시간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한번 태어났으면'이란 말을 자주 언급했는데 새삼 세속적 기준이 뼛속까지 새겨졌었구나 자각하는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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