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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Jan 26. 2023

예상치 않게 뚜벅이가 됐다

누군가 운전해주는 이동수단을 타고 어딘가를 향해 가는 게 정말 편했구나 싶은 하루였다. Paul 제공

명절 다음날 회사를 들어가기 위해 새벽에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가는 회사였기에 차가 막힐까 염려했고 조금 일찍 서둘렀다. 고속도로를 올리기 위해 교차로를 지나던 찰나에 쿵 소리가 났다. 차가 밀리기 시작하며 앞에 가던 차가 급하게 정차를 했고 간격이 좁아 내가 미처 속도를 다 줄이지 못한 것이었다. 범퍼카를 박듯이 난 소리를 뒤로 하고 차에서 내려보니 앞부분이 박살나 있었다.


빠르게 보험회사를 불렀고 데스크에게도 전화를 걸어 조금 늦게 들어갈 것 같다 보고를 했다. 다행히 앞서 가던 차는 뒷 번호판 밑으로 일부 파손이 있을 뿐 비교적 멀쩡했다. 운전자도 충돌에 잠시 놀랐었고 몸은 이상이 없다고 말했다. 이후 차를 안전지대로 옮기는 과정에서 바닥에 떨어진 잔해물을 함께 치워주셨다. 곧이어 보험사 직원이 도착했고 뒷처리를 맡을테니 출근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렇게 현장을 빠져나왔다.


이날은 되게 추운 날이었다. 지하철을 탄 적이 까마득했는데 서울로 향하는 다른 직장인들 무리에 껴 헐레벌떡 탑승을 완료했다. 임박한 출근시간에 바로 서있기도 힘들 정도의 만원 지하철을 타고 1시간여를 달려 회사에 도착했다. 내 성격에 당시 사고를 계속 복기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하지 못했다. 이리저리 바쁘게 일을 했기 때문인데 돌이켜보면 아무런 생각 없이 노트북만 쳐다봤던 것 같다.


수리하는 동안 다행히 무료 대차를 받을 수 있어 이날 일을 빨리 마무리하고 받으러 갔다. 차종은 내것보다 좋았지만 2015년식의 청소도 잘 되지 않은 아주 낡은 렌터카였다. 출퇴근을 하기 위해 받아온 것인데 계기판에 찍혀있는 30만 키로를 보고 있자니 운전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이번달에 당직으로 한 이틀만 회사로 가면 되니 그냥 몸이 힘들더라도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받아온 차는 여전히 집 주차장을 지키고 있다.


차를 가지고 가면 꽤나 여유롭게 갈 수 있지만 광역버스를 타야하니 옷을 단단히 여미고 오늘도 일찍 집을 나왔다.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는데 이른 시간임에도 직장인들은 말끔한 상태로 버스에 오르고 내렸다. 환승을 해 지하철을 타서도 전투적인 얼굴을 한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 묘사가 딱 맞았다. 직장이란 전쟁터로 가는 것이니 말이다. 말은 하지 않아도 9시간 뒤 퇴근을 바라보는 마음은 모두 동일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퇴근 무렵이 됐고 빠르게 저녁을 해결한 뒤 집으로 가기 위해 다시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내려 집앞에 도착해 시계를 보니 약 2시간이 지나가있었다. 아침에 내린 눈으로 손에는 우산이 들려있었는데 집으로 가는 길에 쌓여있던 눈을 이리저리 휘저어보기도 했다. 서른이 되서 아이 같은 행동일 수도 있겠지만 뭐 어떤가. 이 시간에 아직 누구도 밟지 않은 하얀 눈을 언제 이렇게 막 다뤄보겠나 싶었다.


그동안 자동차만 타고 다녀서 잊고 살았는데 뚜벅이도 괜찮았지 싶은 마음이 갑자기 들었다. 의도치 않게 버스와 지하철 단말기에 카드를 찍고 다녀야했던 어제와 오늘 썩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컸다고 빠르게 편하게를 추구했는데 건강한 두 다리로 원하는 곳을 향해 걸을 수 있다는 점이 참 감사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마음이 들었다. 여러경로로 사고 소식을 접한 친구와 동료들은 먼저 괜찮냐는 말을 해줬기에 그렇다. 갑자기 달라진 일상 가운데 이만큼의 감사를 느낄 수 있다니 아직 찌뿌등한 몸이 퍽 개운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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