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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Feb 18. 2023

평생 이어졌으면 했던 점심식사

문득 휴대전화 사진첩에서 부모님 사진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걸 깨달은 바 있다. Paul 제공

지난 금요일 드디어 찾아온 휴무에 아주 제대로 쉬어볼 심산이었다. 한동안 잠잠했던 마블시리즈 영화도 개봉했던 터라 여유를 부리다가 오후쯤 가볼까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전날 밤 늦게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가려다 회사 단톡방에 남겨진 데스크의 연락을 보고야 말았다. 가봐야 할 현장이 있다는 것이었다. 휴무자는 고민 없이 쉬면 됐지만 아무도 스케줄이 되지 않을 것 같았고 팀 막내인 나는 눈치껏 손을 들게 됐다.


생각보다 현장 상황이 빠르게 마무리 됐던 바 있다. 함께 취재를 왔던 다른 선배와 커피를 마시기로 했었는데 급히 다른 취재가 생겨 성사되지 못했다. 시계를 보니 곧 점심시간이었고 문득 현장과 아버지 회사가 가깝다는 걸 깨닫게 됐다. 곧바로 전화를 걸었고 별다른 약속이 없다는 아버지의 말에 그쪽으로 넘어가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 아버지 회사에 가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누군가 그랬다. 나이가 들었단 증거는 어딘가를 방문할 때 빈손으로 가지 않는 것이라고. 회사 앞에 도착하자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젊은 직원들이 떠올랐고 근처 카페에서 케이크를 산 뒤 서둘러 사무실로 올라갔다. 케이크를 전달하고 아버지와 곧장 사무실을 나왔는데 아버지는 대뜸 높은 직급에 계신 분을 만나러 가자고 하셨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한번 뵀던 분이었는데 왜 빨리 점심을 먹으러 가지 않는지 난 묻지 않았다. 그분께 "근처 취재하러 왔다가 밥 먹으러 들렸다"는 아버지의 말과 한껏 든든해지신 어깨를 봤기 때문이다.


회사는 강남 근처였기에 얼마든지 비싼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고른 건 일식이었다. 보통 일식집과는 다르게 대구탕을 1인분씩 팔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이걸 드시고 싶다고 하셨다. 이에 난 대구탕 2개와 제일 비싼 초밥세트 하나를 시켰다. 아버지는 그냥 저렴한 초밥이면 된다고 말리셨지만 "어차피 내가 살거다"며 주문을 완료했다.


이후 나온 초밥세트에서 참치와 장어 등 더 맛있을 것 같은 것들을 아버지 쪽으로 밀었다. 요즘 가족끼리 외식을 가면 부모님께 이런 행동을 많이 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배가 부른데 너희 먹어라'고 하시지만. 어느 시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이 내게 보여준 헌신이 하나둘씩 보이며 시작된 행동이다. 앞으로 평생 되갚아도 청산이 되지 않을 은혜인데 기회가 닿을 때마다 움직여야 한다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족하지만 말이다.


식사를 끝내고 짧은 산책길을 아버지와 걸었다. 밥을 먹고 매일 이 길을 걷는다는 아버지의 말 이외에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이제 은퇴를 목전에 두셨는데 반복해서 돌아오는 점심시간마다 어떤 생각을 하시며 걸으셨을까 생각해봤기 때문이다. 종종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셨는데 이 말을 넘어서기 위해 치열한 고민과 나름의 해결책을 찾아가셨을까 싶기도 했다. 이런 숱한 어려움을 겪어내고 마침내 직장인으로서 마침표를 곧 찍게될 아버지가 퍽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내가 가는 걸 봐주시기 위해 지하주차장 입구에서 출차를 기다리고 계셨다. 내 차량이 출구를 빠져나와 회사와 점차 멀어져갔지만 아버지는 당신의 시야에서 자동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셨다. 그 모습을 빽미러로 고스란히 봤는데 오늘 하루 어버이날 특집인가 생각이 들 정도로 오묘한 감정이 계속 교차했다. 평생 아주 커다랄 것 같던 아버지는 이제 왜소해지셨고 과거 가장 당차고 밝으셨을 때의 직장인이 어느새 내가 됐다는 걸 새삼 자각했기에 그렇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학교 회식 때 맛있게 먹었다는 한정식을 가족 단체 대화방에 공유하신 어머니의 연락을 확인했다. 동생은 좋다며 회신했고 그렇게 저녁은 외식으로 결정됐다. 밥을 한창 먹다가 동생은 "오늘 아버지와 오빠는 두번째 외식이다"고 말했다. 이날 하루 동안 식비로만 15만원을 넘게 썼는데 마치 선물을 받은 것처럼 마음은 무척 감사했다. 오늘도 잘 먹었다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들이 그렇게 만들어준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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