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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Mar 18. 2023

제 발로 들어선 길 위의 하루

오전 7시쯤 현장으로 걷고 있는데 문득 내가 택한 직업은 이런거다란 생각이 스쳤다. Paul 제공

지난 수요일 새벽 6시에 지하철을 탔다. 집에서 꼬박 한시간이 걸리는 현장을 가기 위해서였는데 예정된 행사 시간보다 먼저 도착해 스케치를 하려면 별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적어도 올해 들어 한번도 대중교통을 이용한 적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교통카드를 찍고 개찰구를 통과해 지하철을 타는 기분은 참 오묘했다. 그리고 이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어둑한 새벽을 밝히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꽤 많다는 걸 이날 새삼 느꼈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만큼 꾸벅꾸벅 졸다가 드디어 다다른 대학가 근처의 한 역에는 젊은 학생들로 붐볐다. 그래도 나름 안 30대 같이 옷을 입으려 노력했는데 왠지 실패인 듯 했다. 진짜 젊은이들은 이런 고민을 하지도 않을 뿐더러 아무거나 주워입어도 괜찮으니 말이다. 사실 이런 생각보다 오늘은 어떻게 인터뷰를 따서 기사를 마감하고 빠르게 퇴근을 할까하는 고민을 더 많이 했다. 점심 먹기 전 퇴근을 목표로 삼긴 했었는데.


이날의 현장인 한 대학교에 도착하니 나보다 부지런한 몇 매체들이 이미 르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학교 관계자들도 현장에서 이들의 취재를 돕고 있었다. 나도 한켠에 앉아 취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대학 관계자가 쓱 다가옴을 느꼈다. 이 관계자는 "혹시 기자님이신가요? 학생은 아닌 듯 해서요"라며 말을 건넸다. 기자인 것 같은 얼굴은 어떤건지 모르는 척 하고 싶었는데 이보다 '학생은 아닌 것 같다'는 말이 웃펐다. 명함을 주고 받으며 여러 이야기를 하니 금세 행사 시작 시간이 됐고 취재를 진행했다.


한 두시간 정도 걸려 취재가 마무리됐고 마감을 위해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전날 개략적인 내용은 잡아뒀는데 새벽부터 정신없이 나왔던 터라 머릿속이 깨끗해진 상태였다. 공복에 커피를 마실 순 없어 과일 샐러드를 함께 구매했는데 사과가 참 맛있었다. 순간 내가 왜 이런 발제를 해서 사서 고생을 하고 있을까 근본적인 질문을 하기도 했다. 기사를 쓰기 싫다는 마지막 발악인 셈이었다.


오후 편집회의 전까지 기사 출고를 마무리해야 했기에 손가락을 쉴 새 없이 눌렀다. 현장 보고를 바탕으로 날라온 데스크의 여러 주문들까지 반영하려면 빠듯한 시간이었다. 전날 필요한 전문가 인터뷰들은 따놓은 덕분에 나름 수월하게 마감을 할 수 있었다. 기사를 털고 나니 정오 언저리가 됐고 근처에서 빠르게 점심을 해치운 뒤 다시 지하철에 올라탔다. 분명 잠을 좀 자야지 다짐했는데 데스킹으로 휴대전화가 계속 울려줬다.


여차저차 기사는 출고돼 곧바로 퇴근하면 됐지만 회사로 들어가야 했다. 지난달 작성한 르포 기사로 상을 받게 됐기 때문이었다. 쟁쟁한 기사들이 너무 많아 감히 내게도 기회가 주어지리라 생각치 못했는데 수상 연락을 받았을 때 얼떨떨했다. 시상은 편집회의 전에 이뤄졌는데 대표와 각 부서 데스크가 보는 앞에서 국장이 수여해주는 것이었다. 뻘쭘했지만 스스로 위안이 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이 큰 회사에 와서 미약하게나마 어떤 족적을 남기긴 했다 정도의 뿌듯함이었다.


이날 기준으로 일주일은 아직 4일이나 더 남았었고 스케줄은 꽉꽉 채워져 있었다. 정말로 땅이 꺼질 만큼의 한숨을 퍽퍽 쉬어도 백번 이상 내쉰 것 같은데 그럼에도 무언가 모를 즐거움이 느껴졌다. 드디어 정신이 나간건가 나를 다독여보기도 했다. 이윽고 즐거움 속에는 감사가 적잖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인지하게 됐다. 정신없이 바쁘고 힘이 들어도 딱 한 번 뿐인 삶 가운데 원하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다른 어떤 것보다 이게 제일의 감사라는 걸 온몸으로 느꼈던 하루의 마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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